"이제 나는 비를 타고 액체 거름처럼 돌아왔습니다." 동독에서 추방된 뒤 싱어송라이터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이 남긴 말입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동독으로 건너갔던 그는 지금, 태어난 곳 함부르크에 다시 살고 있습니다. 1936년생인 그의 인생은 한 개인의 선택이 한 국가의 운명과 얽힌 20세기 독일사 그 자체입니다.
함부르크의 아들, 'Hamburger Jung'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인 볼프 비어만은 타고난 '햄부르거 융(Hamburger Jung)', 즉 함부르크의 아들입니다. 그는 1936년 11월 15일 한자동맹 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오늘날에도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조선소 노동자였던 유대인 아버지는 공산주의 저항운동에 가담했다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어만은 함부르크 하인리히 헤르츠 고등학교(Heinrich-Hertz-Gymnasium)에 진학한 몇 안 되는 노동자 계층 출신 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정치적 감각을 드러냈습니다. 1950년, 13세 소년은 동독에서 열린 FDJ(자유독일청년) 제1차 독일 회의에서 독일연방공화국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스스로 택한 조국, 동독
함부르크에서 학업을 마친 17세 소년은 동독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마르고 호네커(Margot Honecker)와의 인연도 그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수십 년 후 비어만은 그녀의 후원을 받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비어만은 슈베린 근처 가데부슈(Gadebusch)의 기숙학교에서 2년을 보낸 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고, 이후 철학과 수학으로 공부 영역을 넓혔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베를린 앙상블(Berliner Ensemble)'에서 조감독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베를린 브라우트강': 장벽 건설을 다룬 금지된 작품
비어만은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합니다. 1961년에는 동베를린 노동자·학생극장(b.a.t.)을 설립했지만, 베를린 장벽 건설을 소재로 한 연극 '베를린 브라우트강(Berliner Brautgang)'은 공연이 금지되었고 극장은 초연 전에 문을 닫았습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택한 동독은 그에게 예술가로서의 첫 활동 금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는 또한 2년간 SED(독일사회주의통일당) 후보 당원으로 지냈지만 정식 승인받지 못했습니다.
"동쪽의 볼프 비어만이 서쪽의 볼프강 노이스를 방문하다"
확신에 찬 동독 시민에서 SED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자로 — 비어만의 태도와 가사는 결국 동독에서의 공연 금지로 이어졌습니다.
동베를린 카바레 '디 디스텔(Die Distel)'에 출연한 뒤, 비어만은 1964년 연방공화국 무대에 처음 게스트로 섰습니다. 1965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볼프강 노이스(Wolfgang Neuss)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고, '동쪽의 볼프 비어만이 서쪽의 볼프강 노이스를 방문하다'라는 제목의 LP가 곧 발매됩니다. 같은 해 그는 서독에서 시집 'Die Drahtharfe'를 출판했습니다. 그 결과 SED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는 그의 출연과 출판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명목은 '계급 배반'과 외설이었습니다.
'Chausseestraße 131': 아파트이자 녹음 스튜디오, 그리고 LP
오랫동안 비어만은 자신의 노래가 언젠가 동독 음반사 Amiga나 Eterna를 통해 나오기를 바라며 서독에서의 음반 발매를 자제해 왔습니다. 그러다 그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니다. 녹음 스튜디오를 쓸 수 없었기에 첫 정규 음반의 녹음은 몰래 들여온 서구 장비의 도움으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음반 제목이기도 한 Chausseestraße 131에서 말입니다.
1976년 쾰른 콘서트, 그리고 추방
11년간의 활동 금지 끝에 비어만은 1976년 9월 프렌츨라우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다시 무대에 섰습니다. 당시 그는 의사 크리스티네 바르크(Christine Barg)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1월, 쾰른으로 향합니다.
1976년 11월, 비어만은 1965년 부활절 이후 처음으로 독일 무대에 서서 쾰른 슈포르트할레(Sporthalle)에서 거의 매진된 관객 6,800명 앞에서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IG 메탈(금속노조)에서 열린 이 콘서트는 ARD를 통해 방송되었고, 공연 중 그는 여러 차례 동독을 비판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동베를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독 지도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원치 않는 존재'를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비어만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국외로 추방되었습니다. 훗날 알려진 바로는, 동독 지도부는 비어만이 국경을 넘기 훨씬 전부터 이 조치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술가들의 항의, 그리고 동독 떠나기
싱어송라이터의 추방 조치는 동독 반체제 인사들에게 극심한 충격이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청원으로 항의했고, 동·서독 곳곳에서 서명이 모였지만 헛수고로 끝났습니다. 이후 몇 년간의 보복과 괴롭힘 속에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이 동독을 떠났습니다. 1977년에는 비어만의 옛 파트너였던 배우 에바마리아 하겐(Eva-Maria Hagen)과 그녀의 딸 — 훗날 가수 니나 하겐(Nina Hagen)으로 알려진 카타리나 — 마저 서독으로 건너왔습니다.
"변하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충실하다"
추방된 비어만은 상자에 담긴 짐 몇 개만 받았습니다. 그는 저작 활동을 통해 계속 동독을 비판했고, 서독에서 새로운 경력을 쌓았습니다. 1989년 바트홈부르크포어데어회에 시로부터 프리드리히 횔덜린상을, 1991년에는 뫼리케상과 게오르크 뷔흐너상을 받았습니다. 1993년 뒤셀도르프시는 그에게 하인리히 하이네상을 수여했고, 1998년 5월 17일에는 독일 국립재단으로부터 독일 국가상을 받았습니다. 2006년에는 시 부문 요아힘 링게르나츠상과 대연방공로십자장을, 이듬해에는 베를린시 명예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비어만은 지금 다시 함부르크에 살고 있습니다. 열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옛 파트너 에바마리아 하겐은 자신의 삶과 비어만과의 사랑을 담은 책 'Eva und der Wolf'(1998)를 썼습니다.
베를린 주립도서관의 비어만 아카이브
무엇보다 싱어송라이터 볼프 비어만의 동독 여권도 베를린 주립도서관 목록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기록물과 일기는 이제 베를린 주립도서관 소장품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주립도서관이 속한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은 비어만이 "동독 저항세력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소리 중 하나"였으며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논쟁을 촉발했다는 점을 근거로, 그의 개인·전문 기록 컬렉션 수집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