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작 드라마 『문밖(Draußen vor der Tür)』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가장 위대한 성공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무대 공연에 앞서 75년 전인 1947년 2월 13일, 라디오 드라마로 먼저 방송되었다.
"관객은 몇 분간 숨을 죽인 채 앉아 있었다"
함부르크 캄머슈필레 극장에서 1947년 11월 21일, 『문밖』의 초연이 열렸다. 이 연극은 보르헤르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었고, 소위 '폐허 문학(Trümmerliteratur)' 시대를 형성했다. 작품은 전쟁에서 돌아온 베크만이라는 남자가 황폐해진 함부르크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자신의 연극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전날 바젤에서 26세의 나이로 투병 끝에 사망했다.
초연에서 베크만 역을 맡은 한스 퀘스트는 이 작품이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회고했다. 공연 전, 연출가 이다 호른이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보르헤르트의 부고를 알렸다. "관객이 일어섰고, 우리는 공연 시작 전 몇 분간 침묵 속에 머물렀습니다." 훗날 배우이자 극장장으로 활동하다 1989년 작고한 그녀가 회상했다. 그리고 막이 내린 후의 반응은? "초연이 끝난 후 관객은 몇 분간 객석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습니다." 주연 한스 퀘스트가 1985년 NDR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그제야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박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크프리트 렌츠도 흠모한 작가
함부르크 캄머슈필레는 이 포스터로 『문밖』의 세계 초연을 알렸다. 1947년 초연 이래 이 연극은 독일 무대에서만 180회 이상 공연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2018년 2월, 함부르크 온스오르크 극장에서 저작어(플라트도이치) 버전인 『Buten vör de Döör』로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고, 이어진 사립극장 축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보르헤르트의 단편 소설 「개꽃(Die Hundeblume)」, 「부엌 시계(Die Küchenuhr)」와 시편들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보르헤르트는 오늘날에도 가장 많이 읽히는 함부르크 출신 전후 작가입니다."라고 한스-게어트 빈터는 말한다. 그는 세계 볼프강 보르헤르트 협회 회장으로, 전 세계 200여 명의 회원(헬무트 슈미트, 헨닝 보셔라우, 지크프리트 렌츠 등 포함)을 둔 일종의 팬클럽을 이끌고 있다.
"보르헤르트는 많은 독일 작가들의 롤모델이었다"
"보르헤르트는 많은 독일 작가들에게 롤모델이었습니다." 빈터의 말이다. "지크프리트 렌츠는 자신의 단편 소설들이 볼프강 보르헤르트 없이는 상상할 수 없었으며,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렌츠에 따르면, 보르헤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 이후 독일어를 되찾은 최초의 작가였다. 렌츠가 라디오 드라마 『문밖』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빈터는 전한다.
라디오 드라마가 불러온 엄청난 반향
함부르크에서 열린 『문밖』 첫 라디오 드라마 녹음 현장. 한스 퀘스트(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베크만 역을 맡았다. 렌츠와 같은 경험을 한 독일인들이 당시엔 적지 않았다. 연극 초연 아홉 달 전, 이 작품은 NDR의 전신인 NWDR 방송을 통해 라디오 드라마로 먼저 전파를 탔다. 1947년 2월 13일 방송 당시, 청취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오늘날 함부르크 대학의 볼프강 보르헤르트 문고에는 당시 방송국으로 날아든 수백 통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열광적인 지지부터 충격과 경악에 찬 항의까지 다양했다.
"당시 온 세상이 느꼈습니다. 여기 우리 모두의 고민을 대변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보르헤르트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언론인 악셀 에게브레히트(1899-1991)의 회고다. "그 효과가 컸던 이유는, 보르헤르트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아무런 꾸밈 없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종전 직후 사람들에게 그건 믿을 수 없는 울림이었습니다."
『문밖』 줄거리
이 연극은 병사 베크만이 함부르크로 돌아오는 하루를 그린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우고 포로 생활을 했던 베크만은 전쟁의 상처로 무릎이 망가진 채 귀향한다.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 베크만은 엘베 강에 몸을 던지려 하지만, 물은 그를 블랑케네제 해변으로 다시 뱉어낸다. 부모님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회엔 그의 자리가 없다. 수많은 질문이 그를 괴롭힌다. 작품은 이 절규로 끝맺는다: "아무도, 단 한 명도 대답하지 않는가?"
병상에서 쓰인 『문밖』
보르헤르트는 본래 배우가 되고 싶었다. 1941년 연습 장면. 1946년 가을, 보르헤르트는 함부르크 알스터도르프의 카를-콘-슈트라세 자택 병상에서 『문밖』을 썼다. "보르헤르트 본인이 일주일 만에 썼다고 말했습니다." 빈터가 전한다.
당시 그에게 글쓰기는 고육지책이었다. 중증 황달로 꿈꿔오던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보르헤르트는 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빈터의 말이다. 서점 견습생이었던 보르헤르트는 자신의 '연극 광기'를 말하며 사설 연기 레슨을 받기도 했다.
18세에 히틀러 풍자극 『치즈』를 쓰다
1941년 징집되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징집 전 그는 동하노버 주립극장의 순회극단에서 몇 달간 활동했다. 무대에 대한 열정은 일찌감치 드러났다. 1939년, 18세 때 친구와 함께 『치즈(Käse)』라는 희곡을 썼다. "히틀러 풍자극입니다." 보르헤르트 전문가 빈터의 설명이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치즈 장수의 이야기다. 보르헤르트는 이 대본을 연극계 거장 구스타프 그륀겐스에게 보냈다. "하지만 당시 공연은 꿈도 꿀 수 없었죠." 빈터가 말한다. "다행히 게슈타포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보르헤르트는 나중에 나치 정권과 충분한 마찰을 빚게 됩니다."
사형 선고를 면하다
전선에서 휴가 나와 함부르크에 머물던 보르헤르트. 그는 뼛속까지 함부르크 사람이었다.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1939년 보이젠 서점에서 견습을 시작했으나 1940년 말 그만뒀다. 1941년, 스무 살에 러시아 전선으로 끌려갔다. 1942년 2월 총상으로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그 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혐의: 자해. 나치 정권에 대한 모욕 발언으로 두 차례 더 재판을 받았다. 사형은 면했지만, 재판 기간 수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5년 봄, 프랑스군 포로가 된 보르헤르트는 프랑크푸르트 근처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도보로 약 600km를 걸어 5월 10일, 종전 이틀 뒤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생의 마지막 두 달, 스위스 요양원에서
전쟁의 후유증에서 그는 회복하지 못했다. 함부르크에서의 수개월 입원도 소용없었다. 오랫동안 황달로 퀸스색(노란빛)을 띤 얼굴로 병상에서 방문객을 맞았다. "얼굴이 마르멜로처럼 노랬어요." 에게브레히트가 훗날 증언했다. 그런데도 보르헤르트는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써냈다. 사망 두 달 전, 스위스 요양원으로 옮겼지만 그곳 의사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평화 운동의 영웅
빈터 교수는 보르헤르트가 앞으로도 계속 읽힐 것이라 확신한다. 단편 소설은 교과서에서, 전집은 그의 생명력 넘치는 '젊은' 언어를 사랑하는 독자들에 의해. 그리고 전쟁 반대자들의 반전 작가로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트라우마를 그렸기 때문이다. 특히 함부르크 시민들의 보르헤르트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보르헤르트 작품 낭독회와 공연은 항상 만석을 보장한다고 빈터는 전한다.
삶과 작품, 병실을 보여주는 '보르헤르트 박스'
2021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함부르크가 보르헤르트를 읽다'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행사가 기획되었다. 카를 폰 오시츠키 함부르크 주립대학도서관에는 '불협화음(Dissonanzen)'이라는 대형 유리 '보르헤르트 박스'가 설치되어 2021년 이후에도 공개되고 있다. 작가로서의 삶과 작품 세계, 그리고 그의 병실을 실물과 디지털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