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베노 오네조르크: 한 청년의 죽음이 서독을 바꾸다

1940년 10월 15일 하노버에서 태어난 베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는 1967년 6월 2일 서베를린에서 열린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26세의 학생이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서독 학생 운동의 급진화와 정치화를 촉발한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이 상징적 인물 뒤에는 어떤 삶이 있었을까?

잔혹한 진압 작전 희생자가 된 베노 오네조르크

1967년 초여름, 이란의 샤(Shah) 레자 팔라비와 그의 부인이 서독을 공식 방문했다. 6월 2일,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고 고문을 자행한다는 비판을 받던 독재 군주에 항의하며 서베를린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하인리히 뤼브케(Heinrich Lübke) 연방대통령과 함께 오페라 공연을 관람 중이던 샤 부부를 향해, 베를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2,000명이 쇠네베르크 구청 앞 광장에 모였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경찰이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고, 물대포를 쏘고 무방비한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구타했다. 26세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가 한 건물 뒤뜰에서 중재를 시도하던 중, 세 명의 경찰관에게 구타당하고 뒤통수에 근접 사격을 당했다. 그는 잠시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베노 오네조르크는 누구였나?

그의 죽음이 추가 시위를 촉발하고 학생 운동을 확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베노 오네조르크 개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세 형제 중 둘째였던 그는 1940년 10월 15일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진학하지 않고 쇼윈도 장식 견습공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높은 꿈이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아비투어 취득

그는 시에 관심이 많았고 미술관을 드나들며 판화와 데생 같은 예술 기법을 익혔으며, 미술 교사가 되고자 했다. 견습을 마친 후 인재 양성 기관인 브라운슈바이크 대학예비과정(College)에 지원해 아비투어(대학입학자격시험)를 준비했다. 나이가 어려 1년간 입학 허가를 기다려야 했고, 그동안 프랑스 포도 수확 일꾼 등 임시직으로 생계를 꾸리며 여행을 다녔다.

오네조르크와 우베 팀: 글쓰기와 토론

1963년 봄까지 2년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그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사르트르와 베케트를 읽고 대체로 타인과 거리를 둔 조용한 독신자였다. 훗날 유명한 작가가 된 동급생 우베 팀(Uwe Timm)은 그를 "근심 없는 사람"으로 회고했다. 둘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습작을 보여주며 오랫동안 비평했다. 둘 다 배움에 목말라 있었고, 예술과 문화 활동을 통해 다른 삶을 꿈꿨다.

베를린에서의 대학 생활

베를린 예술대학 입시에 실패한 오네조르크는 자유대학교(Freie Universität)에서 독어독문학과 로망스어문학을 전공했다. 진로 목표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는 분단된 도시 동베를린으로 자주 넘어가 베를리너 앙상블 극장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을 관람했다. 개신교 학생 공동체 회원으로 평화주의자였으며,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논란이 된 교육 정책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군축을 주장했으며, "제3세계" 국가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토론에 참여했다. 언론인 우베 주쿠프(Uwe Soukup)가 저서 을 위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형에게 베를린의 경찰 폭력이 심해지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샤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리기 6주 전, 베노 오네조르크는 결혼해 임신한 아내 크리스타와 베를린 빌머스도르프구의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베를린을 떠나 괴팅겐처럼 조용한 도시의 대학에서 시험을 치르는 방안을 고려 중이었다.

경찰의 총탄에 쓰러진 오네조르크

경찰관 카를하인츠 쿠라스(Karl-Heinz Kurras)가 오네조르크의 뒤통수에 총을 쏴 살해했다.

오페라 공연 전날 저녁, 베노 오네조르크는 당초 당국과의 충돌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관들에게 항의하고 돌을 던지는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크루메 거리(Krumme Straße)에서 소란을 피해 달아나는 아내와 헤어진 그는, 경찰에 쫓기는 시위자를 돕기 위해 건물 뒤뜰로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경찰 간부 카를하인츠 쿠라스가 쏜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가까운 거리에서 뒤에서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쿠라스는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오네조르크 죽음 이후 격화된 학생 시위

1967년 6월 2일은 서독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오네조르크의 폭력적 죽음은 학생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겼고, 그들을 정치화시켰다. 서독과 서베를린 학생의 거의 절반이 베노 오네조르크 추모 집회에 참여했다. 이후 몇 달간 곳곳에서 시위가 격화되었다. 그동안 대학의 경직된 구조, 시대착오적인 커리큘럼, 불공평한 교육 기회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제는 정치적 상황 전반에 대한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대연정, 나치 과거 청산의 부재, 미국의 베트남 전쟁 등이 새로운 표적이 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장례 행진과 추모 집회

1967년 6월 9일, 독일 전역에서 모인 약 7,000명의 학생이 하노버 시내를 행진하며 베노 오네조르크의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

오네조르크의 관을 실은 약 200대의 차량 행렬이 하노버 보트펠트 공동묘지로 향했다. 동시에 수천 명, 대부분 학생들이 도심에서 침묵 행진을 벌였다. 저녁에는 슈타디온 슈포르트할레(경기장 스포츠홀)에 모여 유명한 추모 집회가 열렸다. 좌파 성향의 저명한 교수들과 학생 운동가들—정치학자 볼프강 아벤트로트(Wolfgang Abendroth),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학생 지도자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 등이 연설했다. 이 집회는 소위 '정치화된 대항 공론장'의 창설 행사라 불린다.

경찰의 은폐 시도

이후 학생 운동은 더욱 급진화했다. 주요 정치인들이 여전히 권위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베를린 시장 하인리히 알베르츠(Heinrich Albertz, 사민당)는 오네조르크의 죽음을 시위대 탓으로 돌렸다. 게다가 베를린 법원은 가해자 쿠라스에게 여러 차례 재판 끝에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 과정에서 증거가 조작되고 진술이 묵살되었으며 사실이 은폐되었음이, 2012년 <슈피겔(Spiegel)> 보도에 따르면 연방검찰 조사로 확인되었다.

당시 쿠라스 재판에서 오네조르크 부친의 공동 원고 측 변호인이었던 오토 실리(Otto Schily)는 훗날 이를 "은폐"라고 표현하며, 법치주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다고 고백했다. 이는 소위 '68세대' 대다수에게도 해당하는 경험으로, 이들은 이후 국가와 그 대표자들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게 되었다.

가해자는 슈타지 정보원이었다

1967년 6월 2일의 사건은 오늘날까지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 가해자 쿠라스는 2014년 사망할 때까지 반성 없이 정당방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동독 통일사회당(SED) 당원이자 슈타지(Stasi, 동독 국가보위부)의 고위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사망 5년 전 밝혀졌음에도, 학생 운동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동독 비밀경찰의 개입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네조르크의 죽음과 그 파장

베노 오네조르크의 죽음은 학생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일부 요구가 급진적이었고 몇 년 후 시위가 잦아들었음에도,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사고는 크게 사라졌고, 국가 기관에는 훨씬 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시민의 자유권은 강화되었고, 사회 전반이 더 다원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