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 『로마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역사가이자 민주주의 투사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은 19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19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작 『로마사(Römische Geschichte)』는 오늘날까지도 역사 서술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몸젠은 단순한 책상 속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시민으로서 통합과 자유를 위해 싸웠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다만 독일 제국을 내부적으로 해방시키려는 그의 비전은 생전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고고학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이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테오도르 스톰(Theodor Storm)과 함께한 학창 시절

몸젠은 1817년 11월 30일 북프리슬란드의 가르딩(Garding)에서 태어났습니다. 목사 집안의 장남인 그는 올델슬로(Oldesloe, 슈토름아른 지역)에서 다섯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1834년 10월부터는 알토나의 고전어 김나지움에 다녔으며, 1838년 5월 킬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입학 1년 후에는 훗날 시인으로 유명해진 동급생 테오도르 스톰(Theodor Storm)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함께 거처를 공유했고, 1843년에는 몸젠의 남동생 티코(Tycho)와 함께 시집 『세 친구의 노래집(Liederbuch dreier Freunde)』을 출간했습니다. 같은 해 몸젠은 로마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쳤습니다.

민주주의 신념 때문에 겪은 좌천

몸젠은 자신의 신념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결과 여러 동시대인들과 끊임없는 논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1844년 그는 고전학 연구를 위한 여행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이 여행 중 로마에서 역사에 대한 열정을 발견했고, 로마 제국의 모든 라틴어 비문을 망라한 『코르푸스 인스크립티오눔 라티나룸(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출판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혁명의 해였던 1848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셰 차이퉁(Schleswig-Holsteinische Zeitung)』의 기자로 일했고, 같은 해 가을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로마법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 후 상황이 급변합니다. 색슨 국왕을 축출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려 했던 드레스덴 5월 봉기에 참여한 것입니다. 봉기가 실패하자 몸젠은 수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 복역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윽고 1851년, 그는 민주주의적 견해를 이유로 대학에서 해임되었습니다.

프로이센 아카데미 연구교수직

독일 안에서 더 이상 교수직을 얻지 못하게 된 몸젠은 1852년 취리히로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 그는 오히려 연구에 더욱 몰두했고, 바로 이 시기에 다권본 『로마사』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몸젠은 사실에 대한 세심한 검증을 거치면서도 문학가처럼 흥미진진하고 세련된 문체로 서술했습니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어 8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수많은 독자에게 고대사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로마사』에서 몸젠은 “열정 없이는 천재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신 또한 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858년 몸젠은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겨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소속이 되었고, 3년 후에는 베를린 대학교 로마 고고학 정교수가 되어 1885년까지 그곳에서 강의했습니다. 다만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인기가 많지 않았습니다. 날카로운 논쟁으로 이의 제기를 일축하는 일이 잦았고, 그래서 ‘레이저(Laser)’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반유대주의에 맞선 맹렬한 투쟁

학문적 연구와 별개로 몸젠은 언제나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습니다. 1863년부터 1866년까지, 그리고 다시 1873년부터 1879년까지 프로이센 주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881년부터 1884년까지는 자유당 소속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무가치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고, 나아가 그의 사회정책을 “사기 정책”이라고까지 혹평했습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모욕을 당했다며 몸젠을 형사 고발하기에 이릅니다.

몸젠은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맞서 강력하게 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위 ‘베를린 반유대주의 논쟁’에서 그는 역사가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Heinrich von Treitschke)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사회적으로 용인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트라이치케는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다”라는 악명 높은 슬로건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반면 몸젠은 반유대주의를 “콜레라와 같은 끔찍한 전염병”이라고 규정했습니다. 1890년에는 반유대주의에 맞서는 ‘옹호 협회’ 창립 호소문에 서명한 535명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1902년, 『로마사』로 노벨문학상 수상

1,500편이 넘는 학술 저작과 논문을 남긴 위대한 학자에게 사적인 행복을 누릴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1854년 결혼한 아내 마리(Marie)와는 평생 각별한 유대감을 유지했고, 인생 내내 아내에게 연애 편지를 썼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무려 16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노년의 몸젠은 우울한 기분에 시달렸습니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고, 인생에서 이루어낸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그는 다시 한 번 커다란 영예를 안았습니다. 1902년 『로마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그는 최초의 독일인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오늘날까지 유일한 역사가 출신 수상자입니다. 당시 후보에는 몸젠 외에도 마크 트웨인, 에밀 졸라, 레오 톨스토이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1903년 11월 1일, 몸젠은 샤를로텐부르크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크로이츠베르크 베르크만슈트라세의 삼위일체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역사학을 이어받은 후손들

몸젠은 역사에 대한 열정을 후손들에게도 물려준 듯합니다. 손자 가운데에는 역사가 빌헬름 몸젠(Wilhelm Mommsen), 테오도르 E. 몸젠(Theodor E. Mommsen), 그리고 훗날 연방 기록 보관소 소장이 된 볼프강 A. 몸젠(Wolfgang A. Mommsen)이 있습니다. 증손자인 한스와 볼프강은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사 학자로 활동했습니다. 반면 증손자 올리버 몸젠(Oliver Mommsen)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사비네 포스텔(Sabine Postel)과 함께 브레멘 배경의 『타토르(Tatort)』 시리즈에서 커미셔너 역할로 정기적으로 활약하는 배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