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 함부르크를 빛낸 '함부르크의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은 20년간 음악 감독으로서 함부르크의 문화 예술을 이끌었다. 미하엘리스 교회, 일명 '미셸'에 안장된 이 바로크 작곡가는 무려 300년 전에 태어났다.

아버지를 이은 음악가의 길

"호박이 넝쿨째 굴러떨어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가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자녀들을 살펴보면 실감할 수 있다. 이 바로크 거장의 네 아들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음악가의 길을 걸었고, 생전에는 아버지보다 더 큰 명성을 누렸다. 특히 차남 칼 필립 에마누엘은 당시 유럽 곳곳에서 '위대한 바흐'로 불렸다.

그는 1714년 3월 8일, 튀링겐의 바이마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무덤은 함부르크 미하엘리스 교회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한자 도시 함부르크에서 시 음악 감독으로 마지막 20년을 보내다 1788년 세상을 떠났기에, 오늘날에도 '함부르크의 바흐'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과 배움의 청년기

1870년에 그려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가족. 바흐는 두 번 결혼해 2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일부는 출생 직후 세상을 떠났다.

바이마르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 밑에서 콘서트마이스터 자리를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자녀인 칼 필립 에마누엘이 태어났다. 3년 후인 1717년 12월, 가족은 쾨텐으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레오폴트 후작 궁정의 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1720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1년 뒤 재혼한다. 1723년 가족은 라이프치히로 옮겼으며, 아버지는 토마스칸토르 자리에 취임했다. 칼 필립 에마누엘은 늘 북적이는 칸토르 관사에서 성장했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학생들에게 하프시코드 연주를 가르쳤고, 음악가 친구들이 찾아왔으며, 해마다 새 식구가 태어나는 활기찬 환경이었다. 칼 필립 에마누엘과 형 빌헬름 프리데만은 이 시기에 건반 악기 연주와 작곡을 배웠다. 아버지는 토마스학교에서, 그리고 종종 일과 후 개인적으로 두 아이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작센에서 프로이센으로

1731년 칼 필립 에마누엘은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고, 17세의 나이에 첫 작품인 「메뉴에 포르 르 클라벳생」을 완성했다. 1734년에는 프랑크푸르트(오더) 대학교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으며, 그곳에서 건반 악기 교사로 일하고 여러 음악제에도 참여했다.

1738년 바흐는 베를린으로 이동해 당시 왕세자였던 프리드리히, 훗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발탁되었다. 그곳에서 요한나 마리아 단네만을 만나 1744년 결혼했고, 슬하에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하프시코드.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는 프로이센 궁정에서 이런 악기를 연주했다.

바흐는 1767년까지 왕실에 몸담았다. 이 기간 동안 「베를린 교향곡」과 「뷔르템베르크 소나타」 등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또한 이론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하여 1753년 출간한 저서 「건반 악기 연주론」은 곧 유럽 전역의 표준 교본이 되었다. 바흐는 이 책에 방대한 악보 예시를 곁들이고 연주법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담았다. 오늘날에도 이 책을 통해 18세기 건반 악기 연주의 관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바흐, 함부르크로 가다

음악 감독으로서 바흐는 미셸, 즉 미하엘리스 교회의 음악도 책임졌다.

1767년 칼 필립 에마누엘의 대부였던 작곡가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이 세상을 떠났다. 텔레만은 생전에 함부르크 5대 주요 교회의 음악 감독이자 요하네움의 칸토르였다. 이 자리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음악직 중 하나로 꼽혔다. 텔레만의 대자였던 그는 공석이 된 자리에 지원했고, 결국 임명되었다.

1768년부터 바흐는 미셸을 포함한 5대 주요 교회의 교회 음악을 총괄했다. 요하네움에서는 학생들의 음악 교육을 맡았고, 격식 있는 행사의 축제 음악도 담당했다. 바흐는 새 자리에 각별한 정성을 다해 도시 밖에서도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후 종교 음악 작품들이 그의 음악 인생을 주도하게 된다. 그는 오라토리오 「사막의 이스라엘 백성」(1769)과 「예수의 부활과 승천」(1778년 3월 18일 함부르크 초연) 등을 직접 작곡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한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나 요한 아돌프 하세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고 판매하기도 했다.

미셸 아래 납골실에 잠든 바흐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는 함부르크에서 20년을 살았다. 1788년, 한자 도시 함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함부르크 시절 바흐는 점점 하프시코드를 덜 연주하게 되었다. 통풍이 그를 괴롭혔고, 건강 문제도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여기에 노년의 음악가를 깊이 슬프게 하는 비극이 겹쳤다. 1778년 9월, 사랑하는 아들 요한 제바스티안이 이탈리아 체류 중 세상을 떠난 것이다.

1787년 바흐는 한 친구에게 청중을 위한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음악가는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지만 작곡은 줄었고, 말년에는 아버지의 작품에 더욱 몰두했다. 바흐는 1788년 12월 14일 함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셸 아래 납골실에 있는 그의 무덤은 오늘날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의 음악적 유산

칼 필립 에마누엘의 덜 알려진 업적 중 하나는 아버지의 음악 작품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승한 일이다.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아버지의 악보를 그토록 꼼꼼히 보관하지 않았다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많은 작품을 오늘날 우리가 연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함부르크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합창단 이사 요르크 보데는 설명한다.

1998년부터 이 위대한 음악가의 이름을 걸고 활동해 온 이 명망 있는 콘서트 합창단은 '함부르크의 바흐'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선보이며, 한자 도시 함부르크의 소중한 음악 유산을 지켜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