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왕자로서의 수라즈말 업적 – 자트 왕국을 세운 군사 천재의 발자취

왕자로서의 수라즈말 업적 – 자트 왕국을 세운 군사 천재의 발자취

서기 1742년경, 20년간 국가를 통치해 온 라자 바단 싱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영토 확장, 군대 조직, 정치 협상 등 국정의 핵심 권한을 장남 수라즈말에게 넘기고, 자신은 쿠아미 평의회(Qaumi Parishad)와 함께 내부 행정을 관리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서기 1745년 왕자 프라탑 싱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바단 싱은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고, 수라즈말은 같은 해부터 국가의 유일한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한, 그는 스스로 왕임을 선포하지는 않았습니다.

찬다우스 전투에서 파테 알리 칸 지원

서기 1745년, 수라즈말 왕자는 델리 황제 무함마드 샤의 명을 받아 자트 군대를 이끌고 알리 무함마드 로힐라와 맞섰습니다. 이 전투에서 수라즈말은 남다른 용맹함을 뚜렷이 입증했습니다. 이듬해인 1746년에는 수베다르 파테 알리 칸이 아사드 칸 나자드와 대결할 때 그를 지원하여, 파테 알리 칸이 자신의 자기르(봉토)를 성공적으로 되찾도록 도왔습니다. 수라즈말은 찬다우스에서 아사드의 군대를 격파했고, 아사드는 전투 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라즈말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얻어 귀환했으며, 오늘날 찬다우스는 인도 알리가르 지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이푸르 왕 이슈와리 싱 지원

서기 1743년 자이푸르의 왕 자이 싱이 사망하자, 아들 이슈와리 싱과 마도 싱이 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우다이푸르의 마하라나는 차남 마도 싱 편을 들었는데, 마도 싱은 자이 싱과 결혼한 우다이푸르 공주의 소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라자 바단 싱은 수라즈말에게 군대를 이끌고 자이푸르로 가서 장남 이슈와리 싱을 돕도록 명령했습니다.

수라즈말은 기병 1만 명, 보병 2천 명, 창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쿰헤르에서 자이푸르로 진군했으며, 이슈와리 싱은 그에게 대등한 예우를 베풀었습니다. 1748년 8월 21일, 두 진영 간의 전쟁이 개시되었습니다. 바그루 전투라 불리는 이 3일간의 전쟁에서 수라즈말은 놀라운 무용을 발휘하여 적 병사 50명을 홀로 베어 쓰러뜨리고 160명을 검으로 부상시켰습니다. 덕분에 그는 마라타와 라지푸트 사이에서 '전장의 영웅'으로 명성을 떨쳤고, 이슈와리 싱은 최종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프다르중과의 우정

서기 1748년 델리 황제 무함마드 샤가 사망했습니다. 당시 그의 아들 아흐마드 샤는 파니파트에 머물러 있었고, 나와브 사프다르중이 그 곁에 있었습니다. 사프다르중은 아흐마드 샤를 새 황제로 추대했고, 아흐마드 샤는 사프다르중을 재상(와지르)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선황 무함마드 샤의 재상 니잠울물크가 아직 생존해 있었기에, 새 재상 사프다르중은 수라즈말의 협조를 구했습니다.

수라즈말은 처음에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파리다바드의 차우다리 차란다스와 그의 아들 발람 싱이 무굴 관리의 통치에 반발하여 수라즈말 밑으로 피신해 오면서 상황이 변했습니다. 수라즈말은 그들을 보호하고 파리다바드 파르가나에서 무르타자 칸을 토벌한 뒤,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습니다. 사프다르중은 수라즈말에게 파리다바드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수라즈말은 이를 거부했고, 사프다르중은 군대를 이끌고 그를 공격했습니다. 수라즈말 역시 군대를 일으켜 맞섰습니다.

그러던 중 사프다르중은 로힐라족이 자신의 속주 아와드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아와드로 향하며 수라즈말과 강화 조약을 체결했고, 두 사람은 다시 우호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이후 아흐마드 샤 황제는 수라즈말과 그의 박시(Bakshi, 군무관)에게 공식 예복(킬랏)을 하사했습니다.

로힐라족에 대한 첫 번째 원정

강화 조약 직후, 로힐라족의 지도자 아흐마드 샤 방가시가 사프다르중의 대표 나왈 라이를 살해하고 그의 군대를 후다간지에서 축출했습니다. 이에 사프다르중은 로힐라족 토벌 원정에 나섰고, 수라즈말도 이 원정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연합군은 아흐마드 방가시의 수도 파루카바드를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로힐라족은 수라즈말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수라즈말은 "나는 사프다르중에게 약속했다"며 사절을 돌려보내며 신의를 지켰습니다. 사프다르중과 로힐라족의 전쟁에서 자트 군대는 사프다르중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나, 전쟁의 최종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수라즈말은 신뢰할 수 있고 견고한 자트 정치를 확립했으며, 이 점에서 전임 지도자 추다만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미르 바크시 격파

서기 1749년 6월 20일, 조드푸르의 왕 마하라자 아바이 싱이 사망했습니다. 조드푸르 왕국의 계승권을 두고 아바이 싱의 아들 람 싱과 동생 바크트 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무굴 황제 아흐마드 샤는 바크트 싱 편을 들어, 병사 1만 8천 명과 함께 미르 바크시(최고 군사령관) 살라밧중을 지원군으로 파견했습니다.

미르 바크시는 자트족을 공격하여 최근에 자트족이 차지한 아그라와 마투라 지방을 되찾겠다고 계획했고, 자트족이 장악하고 있던 님라나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수라즈말은 협상을 위해 사절을 보냈지만 미르 바크시는 면담조차 거부했습니다. 미르 바크시가 사라이 소마찬드라는 곳에 도달하자, 수라즈말은 신속히 기동하는 병력 6천 명으로 무굴군을 포위했습니다. 미르 바크시가 델리에 증원군을 요청하자, 자트족은 증원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자트족은 무굴 병사 대다수를 살상했고, 무굴 장군 알리 루스탐 칸과 하킴 칸마저 전사했습니다. 결국 살라밧 칸은 수라즈말에게 화친을 제안했고, 수라즈말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체결된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황제 정부는 피팔(보리수) 나무를 베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2) 황제 정부는 피팔 나무 숭배를 방해하지 않는다.
(3) 황제 정부는 브라지 지역의 힌두 사원을 모욕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
(4) 수라즈말 왕자는 라지푸트로부터 아제르 지방의 세금으로 150만 루피를 징수하여 왕실 금고에 바친다.
(5) 미르 바크시는 나르나울을 넘어 더 이상 진출하지 않는다.

이 승리는 수라즈말과 그의 부하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자트족의 강대한 군사력을 만방에 입증했습니다. 특히 이 조약의 조건들은 브라지 만달 지역에서 바라트푸르 통치자들이 차지한 탁월한 위상을 무굴 제국이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로힐라족에 대한 두 번째 원정

서기 1751년, 사프다르중은 다시 로힐라족 토벌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하루 2만 5천 루피의 비용으로 마라타 군대를, 하루 1만 5천 루피의 비용으로 자트 군대를 고용했습니다. 자트와 마라타의 연합군은 로힐라족의 영토를 초토화하며 막강한 힘을 과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