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호르스트 얀센: 과도하게 산 예술가, 그림 한 줄로 완성한 일생

화가 호르스트 얀센(Horst Janssen)은 지나칠 만큼 파란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여성 편력가이자 난투광, 술꾼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살인 혐의로 구금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타고난 본격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글: 비비안 슈마허(Vivienne Schumacher)

호르스트 얀센은 드로잉 작가였습니다. 그는 평생 자신의 기법에 변함없이 충실했습니다. 그에게 드로잉은 다른 이들에게 흔히 그렇듯 이후의 작품을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예술가로서 그는 1960년대 함부르크 미술계의 위상을 결정짓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지적이면서도 강렬하고 광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으며 과도하게 살았고, 자신의 알코올 중독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렘첸펠트 주립미술학교에서의 수학

호르스트 얀센은 1929년 11월 14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홀어머니와 외조부모 밑에서 올덴부르크에서 자랐으며, 친아버지는 끝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외할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나 이모는 열여섯 살 조카를 함부르크로 데려갑니다. 이미 엠스란트의 나폴라(Napola, 국립정치교육원) 학생 시절부터 드로잉 재능이 두드러졌던 그는 이모의 주선으로 렘첸펠트 주립미술학교(Landeskunstschule am Lerchenfeld)에 입학해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수학했고, 학업 비용 역시 이모가 부담했습니다. 입학 첫날부터 알프레트 말라우(Alfred Mahlau)의 마이스터슐러(사숙 제자)가 되었으며, 재학 중에 이미 첫 드로잉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한스 브록슈테트 갤러리에서 열린 첫 전시

1947년 그의 드로잉 한 점이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에 실렸습니다. 이듬해에는 카스퍼레 동화책 『다들 제정신이냐?』가 출간되었는데, 18세의 얀센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롤프 이탈리안더가 지은 카스퍼레 구절의 삽화를 맡았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작품에 직접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23세 때는 함부르크 한자자유시로부터 리히트바르크 장학금을 받았고, 이후 첫 프로 경력의 성공과 추가 장학금이 이어졌습니다. 1956년에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컬러 목판화 전시를 열었고, 한 해 뒤에는 하노버의 한스 브록슈테트 갤러리에서 첫 공개 전시를 가졌습니다.

1964년 다름슈타트 시 예술상을 처음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함부르크 시로부터 에드빈 샤르프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한자도시의 문화 생활을 빛내는 예술가들에게 수여되는 상입니다. 진정한 커리어의 전환점은 1965년 하노버 케스트너 게젤샤프트(Kestner Gesellschaft) 전시에서 맞이했으며, 이 전시는 다름슈타트, 슈투트가르트, 뒤셀도르프, 뤼베크, 그리고 스위스 바젤 등 독일 주요 도시를 순회했습니다. 1968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판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차례의 결혼과 자녀들: 격동적인 사생활

예술 경력과 때를 같이해 호르스트 얀센의 사생활도 격랑의 길을 걷습니다. 경력 초반 기혼 여성과의 사이에서 첫 아들을 얻었는데, 아들 클레멘스는 1950년에 태어났습니다. 3년 뒤에는 질투에서 비롯된 살인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음주 관련 행위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55년 마리 크나우어와 결혼해 이듬해 딸을 얻었으나 1959년 이혼했습니다. 같은 해 비르기트 잔드너와 재혼했지만 이 결혼은 몇 주 만에 깨졌습니다. 1960년에는 베레나 폰 베트만홀베크와 다시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아들 필립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 또한 1968년 이혼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1970년대, 자연이라는 주제로 눈을 돌리다

초상화 외에도 얀센은 1979년의 이 잘 알려진 모티프처럼 수많은 꽃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성 편력가이자 난투광, 술꾼이라는 평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이 쾌락주의자는 1970년대에 들어 풍경에 눈을 뜹니다. 그전까지 주로 풍자화·초상화·꽃을 그려왔다면, 이제는 자연을 소재로 한 드로잉과 에칭에 본격적으로 매달립니다. 만하임 시는 1975년 그에게 실러 상을 수여했고, 이듬해에는 쿤스트할레에서 그의 판화 작품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2년 뒤에는 올덴부르크 시립박물관이 그의 포스터 다수를 전시했는데, 이 포스터들은 원래 그가 자신의 작품 발표회를 알리는 데 사용하던 것들이었습니다.

빈, 도쿄, 모스크바: 세계 곳곳에서 열린 전시

호르스트 얀센은 1982년 이 파스텔화에 『알라는 다채롭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1980년대 초, 예술가는 국제적 돌파구를 마련합니다. 빈, 도쿄, 오슬로, 파리,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 등지에서 그의 작품 전시가 열렸고, 미국의 주요 미술관들은 그의 작품 순회전을 선보였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저술 활동에도 점점 몰두했습니다. 1987년 자서전 1권 『힌케포트(Hinkepott)』가 출간되었고, 2년 뒤에는 2권 『요하네스(Johannes)』가 나왔습니다.

여성들과의 수많은 관계는 그의 말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얀센은 세 번째 이혼 이후 게셰 티텐스(Gesche Tietjens)와 동거하며 살았습니다. 1970년대 초 두 사람은 함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여행하기도 했지만, 얀센은 곧 임신 중이던 연인과 헤어졌고, 그녀는 1973년 얀센의 넷째이자 마지막 아이를 낳았습니다.

1995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다

1990년 5월 19일, 호르스트 얀센은 심각한 사고를 당합니다. 61세였던 그는 함부르크 블랑케네제에 있는 자신의 집 발코니에서 추락했고, 에칭 작업에 쓰던 산이 가득 담긴 통 여러 개도 그와 함께 떨어졌습니다. 산에 의한 화학 화상으로 실명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피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왕성하게 작업하며 성가를 이어갔습니다. 1990년대에는 드레스덴, 도쿄, 오슬로, 라이프치히, 함부르크에서 전시가 열렸습니다. 1992년에는 올덴부르크시로부터 명예 시민권을 받았고, 1995년에는 올덴부르크가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해 얀센은 뇌졸중을 앓아 8월 3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덴부르크, 박물관으로 호르스트 얀센을 기리다

올덴부르크의 호르스트 얀센 미술관은 총 1,000㎡ 규모의 공간에서 작품과 예술가의 인간적 면모를 함께 만날 수 있게 해줍니다.

1997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함부르거 쿤스트할레는 얀센 캐비닛(Janssen-Kabinett)을 마련했습니다. 현대 미술 갤러리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획전을 통해 호르스트 얀센의 판화 작품 세계를 선보입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올덴부르크에 호르스트 얀센 미술관이 문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