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독일의 풍경은 에밀 놀데(Emil Nolde)의 소묘·수채화·유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모티프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술 세계만큼이나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이 바로 국가사회주의(나치즘)와 얽힌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입니다.
농가에서 태어난 소년, 에밀 놀데
에밀 놀데는 1867년 8월 7일, 퇴네르(Tønder) 인근의 작은 마을 놀데에서 농부의 다섯 자녀 중 넷째로 '한스 에밀 한젠(Hans Emil Hanse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에서 예술적 재능이나 야망을 짚어낼 수 있는 이는 없었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 예민했던 어머니는 꽃밭을 정성스레 가꾸는 분이었고, 어린 에밀은 그런 어머니를 깊이 존경했습니다.
나쁜 학생이었지만, 그림만큼은 남달랐던 아이
놀데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선생님들에게 이미 뛰어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정작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1875년 크리스마스, 여덟 살 소년의 가장 큰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물감 상자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비트 뿌리와 엘더베리 즙으로 직접 만든 물감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놀데는 독학으로 미술을 익혔습니다. 마구간 문, 농부의 수레, 작은 점토 인형에 그림을 그리며 이른바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예술가의 길을 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16세에 학교를 마친 뒤 부모님 농장에서 1년간 농사일을 도왔고, 이윽고 아버지와 타협점을 찾아 예술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테오도르 스톰의 책상 위 부엉이를 조각하다
1884년부터 1888년까지 놀데는 플렌스부르크의 자우어만 가구 공장에서 조각 견습 과정을 마쳤습니다. 견습생 시절에는 슐레스비히 대성당의 유명한 브뤼게만 제단 복원 작업에 참여해, 사라진 군인의 미늘창과 검을 조각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플렌스부르크에서 남긴 마지막 작품 중 하나는 작가 테오도르 스톰(Theodor Storm)이 의뢰한 책상용 부엉이 조각 네 마리였습니다.
풍경의 매력이 놀데의 첫 그림에 불을 지피다
놀데는 1892년 스위스 장크트갈렌에서 무역 학교 교사가 되기 전까지 뮌헨, 카를스루에, 베를린에서 숙련공으로 일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첫 시도는 산악 풍경 모티프였고, 엽서로 시장에 내놓은 작품들은 놀랍게도 25,000프랑이라는 수입을 올렸습니다. 스위스에서 6년을 보낸 뒤 그는 안정된 삶을 과감히 포기하고, 베를린의 스튜디오, 그리고 훗날 제뷜(Seebüll)의 농장으로 예술의 무대를 옮깁니다.
놀데의 초기 작품은 인상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꽃·정원·풍경·바다를 소재로 했습니다. '가을 바다'라는 하나의 주제만도 무려 17가지 변주로 그려졌는데, 이는 훗날에도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그의 대표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색채는 점점 강렬해졌고, 이윽고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 아다 빌스트룹과의 운명적 만남
1900년 북방 도시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놀데는 작은 방에 살며 대도시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배우이자 음악가인 아다 빌스트룹(Ada Vilstrup)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 자신이 말했듯 이 만남은 그의 '준비 생애'의 끝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결혼 후 성을 '한젠'에서 '놀데'로 바꾼 것은 그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다와 에밀 놀데 부부는 현재 덴마크령인 발트해 알센 섬에 어부의 집을 구입했고, 겨울에는 베를린의 스튜디오에서 지냈습니다. 1909년부터는 여름마다 더 험준한 서해안으로 향했습니다. 심각한 병을 앓고 난 뒤, 에밀 놀데는 유명한 유화 '최후의 만찬'과 '오순절'을 완성했습니다.
1903년과 1904년에는 부부가 함께 동아시아를 여행했고, 이곳에서 받은 풍경의 색채 인상은 그의 작품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는 예술가 그룹 '브뤼케(Die Brücke)'에 잠시 소속되기도 했습니다. 1926년 에밀 놀데는 마침내 니뷜(Niebüll) 근처 제뷜에 농장을 구입했으며, 이곳에는 현재 놀데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와 얽힌 모순된 관계
오랫동안 에밀 놀데는 대표적인 '퇴폐 예술가'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뷜의 놀데 재단에서 최근 발굴된 사실들은 예술가에 대한 통념에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1933년 이후 그는 유대교적·성서적 인물을 소재로 한 어떤 종교화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영웅적 인물, 제사장, 성(聖)과 풍경 위에 드리운 극적인 하늘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피와 흙'의 이데올로기가 놀데의 회화 속에도 고스란히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놀데는 자신의 그림을 숨겨야 했던 박해받는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1937년 이후 그의 작품 다수가 박물관에서 걷혀 나갔고, 1,052점이 압수되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나치 미술 정책의 피해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반유대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1934년 출판된 두 번째 회고록 '투쟁의 해'가 이를 증언합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고, 같은 해 NSDAP(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동료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을 유대인으로 잘못 낙인찍은 일에 대해서도, 그러한 주장에 따르는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나치 국가에 충성한 화가
1941년 놀데는 독일제국미술회의소에서 제명되어 전시·판매·출판이 금지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평생 주장해 온 것과 달리, 엄밀한 의미의 '그림 금지' 명령이 내려진 적은 없습니다. 나치 국가에 대한 놀데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아내 아다는 남편의 배척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1942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가장 독일적이고 게르만적이며 가장 충성스러운 예술가가 배제되고 있다'고 썼습니다.
뒤늦게 드러난 '놀데 신화'
그럼에도 놀데는 좌흔들리지 않고 당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치 정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전후 몇 년간 놀데는 스스로를 새로운 독일 예술을 대신해 박해받은 예술가, 나치 미술 정책의 희생자로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놀데 신화'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불과 몇 년 전인 2019년 베를린 전시회를 통해서였습니다. 이 여파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총리실에 걸려 있던 작가의 그림 두 점을 직접 내렸습니다.
노년에 만개한, 늦게 찾아온 개화
NSDAP 당원이었음에도 킬의 탈나치화 위원회는 1946년 8월 그를 무죄로 판정했습니다. 놀데는 79세 생일에 명예 교수 칭호를 받았고, 같은 해 11월 아내 아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80세 생일에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채색되지 못한 채 남았던 작은 그림들을 바탕으로, 인상적인 후기 대작들이 잇달아 탄생했습니다. 81세에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친구의 딸, 26세의 요란테 에르트만(Jolanthe Erdmann)과 재혼했습니다. 화가는 1956년 4월 13일 제뷜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아다와의 인연, 그리고 두 사람의 삶은 오늘날 아다·에밀 놀데 재단의 본거지인 하우스 제뷜(Haus Seebüll)에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부부는 정성껏 조성한 아름다운 정원에서 함께 쉼터를 만들었고, 이 정원은 언제나 그들에게 마음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