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 슈미트(Loki Schmidt)는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의 아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 먼저 헌신적인 자연 보호 운동가였습니다. 함부르크의 명예 시민이었던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습니다.
교사, 식물학자, 작가로 활약한 하네로레 '로키' 슈미트(Hannelore "Loki" Schmidt)는 저명한 남편의 배우자라는 수식어 이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학교 정책 등 당대 사회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 보호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환경 보호 활공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상을 받았고,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총리 부인으로 지내는 동안에도 전국적으로 큰 호감과 존중을 얻었습니다.
열 살에 헬무트를 만나다
하네로레 글라저(Hannelore Glaser)는 1919년 3월 3일 함부르크 바름베크에서 산업 전기 기술자의 딸로 태어나, 함머브룩과 함 지역에서 검소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몇 안 되는 개혁 학교 중 하나인 빈터후데의 리히트바르크 학교(Lichtwarkschule)에 다녔는데, 바로 이곳에서 열 살 나이에 훗날 남편이 되는 헬무트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나이에 함께 첫 담배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헬무트 슈미트는 한때 "로키와 나는 70년 넘게 함께 담배를 피워 왔다"고 말했습니다.
1931년 아버지가 실직하자 어머니는 재봉사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로키는 낮에는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업을 밤늦게야 할 수 있는 형편이었지만, 아버지는 나름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친절한 아버지가 커피를 한 잔 타서, 담배 한 개피를 접시에 올려 조용히 내 밑으로 밀어 주곤 했어요." 훗날 로키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이 보상은 깊은 기억으로 남았는지, 그녀는 이후 담배와 커피에는 한 번도 아까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교사에서 총리 부인으로
생물학자를 꿈꿨던 로키는 높은 학비 때문에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대신 1940년까지 함부르크에서 교육학 과정을 밟았습니다. 이후 1940년부터 1972년까지 함부르크의 초등·중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남편이 연방 장관, 그리고 연방 총리가 되면서 공적인 의무를 짊어지게 됩니다.
로키는 자신보다 두 살 위인 헬무트 슈미트와 1942년 6월 결혼했습니다.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 헬무트 발터는 1944년에 태어났으나 몇 달 만에 뇌수막염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7년 태어난 딸 수잔네는 경영학 박사이자 비즈니스 저널리스트로 런던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68년의 결혼 생활
로키와 헬무트 부부는 미술과 음악, 체스, 그리고 브람제(Brahmsee)에 있는 별장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습니다. 두 사람은 68년간 부부로 지냈습니다. 다만 헬무트 슈미트에게는 여러 차례의 외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저서 『내가 더 말하고 싶었던 것』에서 자신보다 18살 어린 함부르크 출신 여성과 오랫동안 이어진 연애 관계를 직접 밝혔지만, 로키가 제안한 이혼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식물과 자연 보호를 위한 헌신
로키 슈미트는 멸종 위기 식물 보호 후원회를 설립했으며, 이 단체는 로키 슈미트 재단으로서 1980년부터 매년 '올해의 꽃'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총리로 재직하던 1974년부터 1982년 사이 로키 슈미트는 수많은 의전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소박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 같은 국가 원수들이 함부르크 랑엔호른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그녀는 직접 케일 요리, 랍스카우스, 구운 감자를 곁들인 로스트비프와 붉은 과일 젤리를 준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로키 슈미트는 남편의 그림자에 숨지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식물 보호자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남편이 본에서 근무하는 동안 덕분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그녀는 훗날 말했습니다. 수많은 재단 활동이 그녀의 주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주로 막스 플랑크 협회 소속 과학자들의 연구 여행에 자비를 들여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1985년 멕시코 여행 중에는 이름 없는 브로멜리아드 종을 발견했고, 전문가들은 이 식물에 '피타이르니아 로키슈미티아에(Pitcairnia loki-schmidtia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치지 않는 헌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봉선화의 일종('임파티엔스 로키슈미티아에')과 달렌베르크 육종가가 만든 난초 교배종('도리엘라 로키 슈미트')도 그녀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그녀의 이름을 딴 전갈과 달리아가 있습니다.
풍성한 저작과 영예
교사이자 식물학자, 작가였던 로키는 2003년 9월 자서전 『로키: 하네로레 슈미트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를 출간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로키 슈미트는 생물 다양성 연구와 보존의 핵심 거점으로서 식물원의 가치를 옹호해 왔습니다. 1997년 출간한 도록에는 독일의 식물원과 그 소장 컬렉션을 처음으로 총망라한 개요가 담겨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위해 그녀는 2년간 조사하며 26,000킬로미터를 이동했습니다. 1976년에는 멸종 위기 식물 보호 후원회를 설립했고, 이 단체는 로키 슈미트 재단으로서 1980년부터 매년 '올해의 꽃'을 선정해 왔습니다. 『올해의 꽃』(2003)을 비롯해 이 주제에 관한 여러 책을 집필했으며, 같은 해 자서전도 출간되었습니다.
80세 생일에는 식물학 분야의 공헌을 인정받아 함부르크 대학교로부터 명예 교수직을 받았고, 2000년에는 함부르크 대학교 생물학과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8년 12월 함부르크 상원은 그녀에게 한자 도시의 명예 시민권 수여를 결정했고, 시상식은 2009년 2월 12일 거행되었습니다. 그녀가 13년간 가르쳤던 옷마르셔 키르헨베크 학교는 현재 '로키 슈미트 학교'로 불립니다.
미하엘리스 교회에서 열린 감동적인 장례식
2010년 10월 21일 새벽, 로키 슈미트는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1월 1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감동적인 장례 예배에서 가족, 친구, 동료들이 그녀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러 왔습니다. 성 미카엘리스(St. Michaelis) 대성당에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와 호르스트 쾰러 전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수많은 정치 동료들을 포함해 2,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았습니다. 로키 슈미트는 함부르크 올스도르프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로키 슈미트를 기억하는 유산
함부르크 클라인 플롯베크 식물원의 청동 흉상은 로키 슈미트를 기리고 있습니다.
2012년 10월부터 클라인 플롯베크 식물원은 '로키 슈미트 정원(Loki-Schmidt-Garten)'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부지 안의 흉상은 함부르크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그녀를 기억하게 합니다. 부지 내 박물관인 '로키 슈미트 하우스' 역시 그녀를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미래적인 파란색 큐브 모양의 이 박물관에서는 유용 식물, 최신 연구 성과, 그리고 로키 슈미트의 자연 보호 활동을 소개하며, 다양한 특별 전시도 개최합니다. 2019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식물원에 로키 슈미트 추모 패가 제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