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 출신 간호사 메리 시콜(1805~1881)은 크림 전쟁 당시 자원봉사를 신청했으나 인종차별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홀로 자신의 힘과 비용으로 6,500km 떨어진 최전선으로 향했습니다.

교육받은 젊은 여성
메리 시콜은 1805년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자메이카의 전통 치유사였던 어머니와 영국군 스코틀랜드 장교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군인과 선원들이 자주 찾는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많은 주민들을 괴롭히던 황열병과 싸우기 위해 아프리카 및 카리브해 전통 요법을 활용했습니다. 메리는 어머니 곁에서 인형에게 흉내를 내며 시작해, 점차 실제 환자를 돕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의술을 익혀갔습니다.
몇 년 동안 메리는 한 노파의 시중을 들었는데, 그 노부인은 메리를 가족처럼 대해 교육 기회까지 열어주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 메리는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런던에 1년간 머물렀고, 이후 보호자 없이 홀로 다시 런던을 방문했다가 1825년 자메이카로 돌아왔습니다. 병든 고용주를 간호하고 난 뒤에야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간호사이자 하숙집 운영자
메리 시콜의 뛰어난 간호 실력은 영국 육군 병원의 수시 호출과 바하마·쿠바·아이티 등지로의 출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열대성 열병과 전통 치료법에 대한 지식을 한층 더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 자메이카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831년 노예 반란이 발발했고, 1838년에는 마침내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1836년 메리는 상인 에드윈 호라티오 해밀턴 시콜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8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던 잡화점 사업이 성공하지 못하자 두 사람은 그랜트 부부의 하숙집 '블런델 홀'에 합류했습니다. 1844년 에드윈이 죽고 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충격에 빠진 메리는 일에 몰두했고 화재로 소실된 뒤 재건된 하숙집 '뉴 블런델 홀'을 물려받아 운영했습니다.
콜레라와 황열병
1850년, 콜레라 유행으로 자메이카에서만 3만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메리 시콜은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의술을 한층 더 연마했습니다. 이렇게 쌓은 경험은 곧바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복동생 에드워드를 만나러 파나마의 크루세스를 방문했을 때, 마침 그 마을에 콜레라가 창궐한 것입니다. 메리가 치료한 첫 번째 환자는 콜레라에서 살아남았고, 이후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메리는 지불 능력이 있는 부유한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무료로 치료해주었습니다. 희생자는 허다했고, 메리 자신도 콜레라에 걸렸지만 기적으로 회복했습니다.
크루세스에서 메리는 잠시 호텔을 운영한 뒤 자메이카로 돌아왔습니다. 귀환 후 자메이카 의료 당국은 황열병 환자 치료를 그녀에게 맡겼습니다. 메리는 환자 치료에 그치지 않고, 주로 아프로-카리브계 치유사들에게 도움을 청해 간호 서비스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1854년, 그녀는 다시 파나마로 향했습니다.
크림 전쟁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같은 해 크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프랑스·영국·사르데냐 왕국 연합군 사이의 대결이었습니다. 전장에 파견된 수천 명의 병사 중 수백 명이 콜레라 등 각종 질병에 걸렸지만, 제대로 된 장비와 인력을 갖춘 병원이 극히 드물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38명의 자원 간호사로 구성된 팀을 꾸려 크림반도의 야전 병원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콜레라 유행병에서 쌓은 자신의 경험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했던 메리 시콜은 런던으로 향해 크림행을 타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피부색과 나이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거절에 굴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메리는 홀로,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의 재산으로 크림반도로 떠났습니다. 파나마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상자와 환자를 위한 숙소를 갖춘 하숙집을 열 계획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이스탄불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만난 메리는 추천서를 꺼내며 다시 한번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또다시 거절당했습니다.
크림반도에서
크림반도에 도착한 메리 시콜은 버려진 목재와 철물, 상자, 강판, 창문, 문짝 등을 재활용해 자신의 호텔을 지었습니다. 1855년 3월 '브리티시 호텔'을 개관하며 첫 손님을 맞이했고, 숙박 외에도 지나가는 병사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팔고 식사를 대접하며 의료 서비스와 순회 진료도 함께 펼쳤습니다.
메리는 병영과 전장을 오르내리며 물품을 팔거나 나눠주는 일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영국 병사들은 그녀를 '마더 시콜'이라 불렀고, 그녀는 전장에서 부상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며, 돈이 없는 이들은 무료로 돌보았습니다. 적의 포화 속에서 전장을 누비던 그녀는 엄지손가락 탈골이라는 부상을 입었고, 이 상처는 평생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1856년 크림 전쟁이 끝나고 군대가 철수하자, 메리는 팔릴 곳 없는 물자들을 손해를 감수하고 처분해야 하는 곤경에 처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파산 상태였고, 채권자들에게 소송까지 당했습니다.

고단한 재정난
메리 시콜의 재정난이 영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녀를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크림에서 메리가 '방탕한 생활'을 한다며 비난하고 자신의 간호사들에게 거리를 두라고 했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역시 이 모금에 동참했습니다. 모금액 덕분에 메리의 빚은 갚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가난은 여전했습니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그녀는 1857년 세포이 항쟁의 부상자를 돕기 위해 인도로 떠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1857년 메리는 자서전 『많은 나라에서 겪은 시콜 부인의 놀라운 모험(The Wonderful Adventures of Mrs. Seacole in Many Lands)』을 출간했습니다. 주로 파나마에서의 세월과 크림 전쟁에서의 경험을 담은 이 책의 서문은 종군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이 집필했으며,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그녀의 헌신과 용기를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잉글랜드가 그녀를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란다. 병든 병사에게 먹이를 주고, 부상당한 이들에게 원조와 위로를 전하려 노력했으며, 죽음을 맞은 저명한 이들의 마지막을 배웅한 사람이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런던에서의 말년
메리 시콜은 몇 년간 자메이카로 돌아가 지냈지만, 이번에도 재정난에 시달렸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런던의 시콜 기금회는 그녀를 위해 킹스턴에 땅을 마련해 줄 새로운 모금을 조직했습니다.
1870년 메리는 런던으로 이주했고, 웨일스 공비의 개인 마사지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881년 세상을 떠났지만, 생전에 누린 명성은 죽음과 함께 사그라들었습니다. 메리 시콜은 기억 속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크게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1991년 자메이카 정부는 그녀에게 사후 자메이카 공로훈장을 추서했습니다. 2000년대부터 영국에서도 그녀의 행적과 이야기가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으며, 2005년 3월에는 런던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박물관에서 그녀의 탄생 200주년을 기리는 메리 시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