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장 조레스(Jean Jaurès) 전기: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이자 평화의 상징

장 조레스(Jean Jaurès) 전기: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이자 평화의 상징1904년 신문 인휴머니테(L'Humanité)를 창간하고 한 해 뒤에는 사회주의 정당인 SFIO(노동자 국제 프랑스 지부)를 설립한 장 조레스(Jean Jaurès)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암살되기까지 비폭력 사회주의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권력 장악 개념을 비판하며, 사회 문제든 대외 정책이든 폭력의 사용에 대해 평생 반대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라는 이상으로 빛나던 좌파의 위대한 도덕적 지도자였던 그는 레옹 블룸,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와 함께 여러 세대의 정치인들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대통령 취임 후 그의 묘소에 고개를 숙였으며, 카스트르에 있는 장 조레스 박물관 개관식을 직접 주재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입문, 장 조레스의 시작

1859년 카스트르에서 부르주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장 조레스는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파리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알비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재직했고, 1883년부터는 툴루즈 문과대학의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정치 경력은 타른(Tarn) 지역에서 시작되어 1885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1892년경 뤼시앵 에르의 영향과 카르모 광산 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사회주의로 전향했습니다. 독립 사회주의 의원으로서 그는 뛰어난 웅변과 비범한 학식으로 빠르게 명성을 쌓았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을 당시 그는 처음에는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신하고 관대한 판결을 비난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가 발표되고 드레퓌스 대위의 상관이 조작한 증거가 폭로되면서, 조레스는 군부 등 기득권의 자의성에 맞서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드레퓌스 방어에 열정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국적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부상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무력 개입한 유혈 파업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두 갈래로 분열되었습니다. 장 조레스가 이끄는 프랑스 사회당과 쥘 게드가 이끄는 프랑스 사회주의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레스는 1902년 총선에서 게드파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장 조레스(Jean Jaurès) 전기: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이자 평화의 상징1906년, 1910년, 1914년에 연속으로 재선되며 그는 이 시기 내내 좌파를 이끌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이 요구한 사회주의 정당 통합(1904년)을 위해 그는 부르주아와의 어떠한 협력도 규탄하고 정부 참여를 배제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1908년, 새롭게 출범한 사회주의 정당(SFIO)은 그에게 사실상의 당 지도권을 맡겼습니다. 인휴머니테지의 창간자로서 그는 합리적 질서에 기반한 인간적이고 세계적인 진리를 확립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종합적 천재였던 그는 이상주의와 유물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민주주의와 계급투쟁, 조국과 인터내셔널을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사회당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평화의 상징, 조레스

조레스는 공화정의 안정이 무엇보다 평화 유지에 달려 있다고 깊이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주의적 이상에 대해 프랑스 내 극우 세력의 부상과 국제적 긴장 고조는 그를 보기 드문 강경함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본의 승리가 전쟁 속에서 민주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라는 원칙 자체에 반대했고, 이는 그의 보편주의적 형제애 정신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조르주 클레망소와 아리스티드 브리앙 같은 옛 정치 동지들이 속속 결집해 갔던 자본주의의 커져가는 영향력 앞에서, 그는 잘 조직된 노동자 인터내셔널만이 세계 경제에 대한 자본의 질식적 지배와 자본주의 경쟁이 평화에 미치는 위험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평화주의는 인터내셔널 대회(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1910년 코펜하겐 대회)에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결의안 채택을 시도하게 만들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일찍이 1910년부터 조레스는 유럽 전역의 내셔널리즘 부상과 전면전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을 우려했습니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방위군 건설을 추진하는 동시에, 장 조레스는 현역 복무 기간을 연장하는 3년 복무법에는 반대했습니다. 또한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전쟁 위기 시 무기 공장의 총파업을 조직하라고 촉구했습니다. 1912년 인터내셔널 바젤 특별 대회에서 행한 그의 유명한 연설은 내셔널리스트들의 격렬한 분노를 샀습니다. 조레스는 자본가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벌이려는 무력 충돌의 어리석음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1914년 7월 25일,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 장 조레스는 다시 한번 평화를 향한 절절한 호소를 쏘아냈습니다. "더 이상 살육과 만행에 시달릴 수 없다. 평화를 유지하고 문명을 구원할 단 하나의 희망은 노동자 계급이 모든 역량을 결집하고, 프랑스인과 영국인,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러시아인이 하나로 연합하여 일치된 심장 박동으로 이 끔찍한 악몽을 물리치는 것이다." 허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습니다. 1914년 7월 31일, 파리의 '크루아상 카페'에서 그는 광신도 청년 라울 비양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이 선전포고를 했고, 8월 4일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각 정당 간 휴전 형태로 마련된 '성스러운 연합(Sacred Union)'에 동참했습니다. 며칠 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장 조레스가 남긴 유산

장 조레스(Jean Jaurès) 전기: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이자 평화의 상징1924년 좌파연합(Cartel des gauches)이 웅장한 국민적 의식을 통해 장 조레스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장하며 추모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은 '청색 지평선' 의회 시절 5년 야당 생활을 마치고 승리한 자신들의 업적을 성대히 기념하는 성격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조레스의 팡테옹 안장에 담긴 당파적 색채는 옅어졌고, 그는 공화국의 집단적 기억 속으로 들어가 20세기의 신화적 인물로 자리잡았습니다.

장 조레스는 모리스 바레스 같은 정적들까지 포함해 모두에게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동시대인들의 존중을 얻었으며, 프랑스는 물론 해외에서도(스페인 공화파들의 냉철한 복수극에서도 드러나듯) 여러 세대에 걸쳐 모든 진영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명성은 실용주의와 휴머니즘, 올곧음과 불굴의 의지가 뒤섞인 그의 인품 전체가 공화국 정직함의 모범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그의 불굴의 헌신은 정치적 진영의 벽을 넘어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제3공화국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의 지속을 가능케 한, 열정에 치우치지 않은 '교사들'의 빛나는 공화국의 화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파 인사이자 고등사범학교 출신 교사였던 조르주 퐁피두조차 자신의 정치적 롤모델이 조레스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회주의 지식인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사회 연구, 1901), 그리고 그의 계승자 레옹 블룸이 '천재의 교향곡'이라 불렀던 소명감에 사로잡힌 행동가였던 장 조레스는 무엇보다도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이자 순교자였습니다. 그가 SFIO 내에서 이루어낸 종합은 프랑스 좌파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극적인 최후가 그에게 더 큰 후광을 씌워준 것을 넘어, 조레스 신화와 그 지속성은 그가 언제나 의회 민주주의의 이상과 노동자 계급의 방어라는 결합을 옹호해 왔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극단주의에서 자유로웠던 그의 프로젝트, 즉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합법적 전환을 통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나아가려는 구상은 레옹 블룸,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같은 인물들의 행보에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참고 문헌

- 장 조레스, 질 칸다르 & 뱅상 뒤클레르(Fayard, 2014)

- 장 조레스, 장피에르 리우(Perrin, 2005)

- 장 조레스: 인류를 위해 싸우다, 레미 카잘(Éditions Midi-Pyrénéennes,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