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9세기를 풍미한 가수이자 작곡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낸 위대한 성악가이자 피아니스트, 그리고 재능 있는 작곡가인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는 자신의 시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9세기를 풍미한 가수이자 작곡가

언니의 뒤를 이어서

폴린 비아르도의 성악가 인생은 부모의 엄격한 교육과 한 비극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자신보다 열세 살 위의 언니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의 죽음이었다. 1821년 7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난 폴린 가르시아는 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 마리아 호아키나 시체스와 유럽 전역의 무대에서 활약한 스페인 출신 테너 아버지 마누엘 가르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빠 마누엘 가르시아 주니어, 언니 마리아, 그리고 폴린은 음악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뛰어난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동시에 자식들을 음악가로, 딸들을 가수로 만들겠다는 부모의 강한 의지 아래에서 자랐다.

가르시아 가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 이론, 성악, 피아노를 배웠다. 언니 마리아는 다섯 살에 처음 무대에 섰으며, 가수의 길을 걷도록 정해진 그녀는 하루 일과, 생활 리듬, 외출, 심지어 식단까지 통제하는 아버지의 특히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열일곱 살부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세 자녀의 교육을 총괄하던 마누엘 가르시아가 1832년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내가 그 뒤를 이었다. 폴린은 피아노 실력으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열두 살 때 작곡가이자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에게 사사받았다. 리스트는 그녀에 대해 "그녀는 타고난 음악가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그녀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는다. 1836년, 스물여덟 살의 전성기를 누리던 언니 마리아가 승마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는 열다섯 살뿐인 막내딸이 언니의 자리를 대신하기로 결정한다. 폴린은 가수가 되기로 한 것이다. 1838년, 열여섯 살이 된 폴린은 오페라 『오텔로(Otello)』의 데스데모나 역으로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그녀는 언니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른다 할 만큼, 언니가 입었던 드레스와 보석까지 물려받아 입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의 요구와 돌아간 언니와의 필연적인 비교라는 극심한 압박 속에서도 폴린은 시련을 이겨냈다. 그녀는 뛰어난 기교와 목소리의 질은 물론, 표현력과 연기력, 비극 배우로서의 재능까지 갖춘 인재로 빠르게 인정받았다.

가수로서의 삶

폴린 가르시아는 가수로서의 경력과 가정 생활을 동시에 이루어 나갔다. 지적이고 매력적이며 재능 있는 그녀는 당시의 미의 기준으로는 못생겼다고 여겨졌음에도 많은 남성들의 눈길을 끌었는데,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는 1840년 자신보다 스무 살 위의 작가이자 평론가, 극장 감독인 루이 비아르도(Louis Viardot)와 결혼했다. 이 선택에서 그녀는 친구 조르주 상드(George Sand)의 조언을 들었으며, 두 사람은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깊은 우정을 나눴다. 네 자녀를 둔 부부는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렸고, 루이는 감독직을 내려놓고 아내의 유럽 순회 공연을 함께 따라갔다.

폴린은 영국, 스페인, 독일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했고, 1843~184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원정 공연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를 만나 연인 관계를 맺었다. 투르게네프는 이후 수십 년간 가족의 절친한 벗으로 남았다. 그녀는 헥토르 베를리오즈, 샤를 구노, 카미유 생상스, 프레데리크 쇼팽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예술가들과 어울렸으며, 벨리니의 『노르마(Norma)』, 글룩의 『오르페우스(Orphée)』, 메예르베르의 『예언자(Le Prophète)』 등에서 주역을 맡았다. 심지어 오페라들이 그녀를 위해 작곡되거나 헌정되기도 했다.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9세기를 풍미한 가수이자 작곡가

완전한 음악가

폴린 비아르도는 단순한 성악가가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관심과 열정을 펼친 완전한 음악가였다. 화려한 경력과 가정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첫사랑인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이자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이자 뛰어난 작곡가인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과 함께 네 손 연주를 공개석상에서나 사적으로 즐겼다. 클라라 슈만은 그녀에 대해 "내가 만나본 가장 빛나는 여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든 독일 바덴바던이든, 그녀가 사는 곳마다 당대의 예술가, 음악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녀의 집은 진정한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폴린은 어린 시절부터 작곡을 시작해 노년까지, 거의 죽음 직전까지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기악곡, 합창곡, 가곡,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테오필 고티에, 알프레드 드 뮈세, 피에르 드 롱사르, 그리고 푸시킨, 괴테, 단테의 시에 곡을 붙였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살고 유럽 전역을 여행한 다국어 구사자였던 그녀는 여러 언어로 작곡했으며, 특히 많은 러시아 문학 작품을 음악으로 옮겼다. 그녀는 두 편의 오페라를 썼는데, 하나는 페로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 『신데렐라(Cendrillon)』이고, 다른 하나는 이반 투르게네프가 대본을 쓴 『마지막 마법사(Le Dernier Sorcier)』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음악가가 된 자녀들과 제자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성악과 피아노, 작곡에 더해 가르치는 일도 이어졌다. 폴린은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성악을 가르쳤으며, 제자로는 펠리아 리트비네(Felia Litvinne)와 잔 제르빌레레슈(Jeanne Gerville-Réache) 같은 훗날 이름을 날린 가수들이 있었다. 무대 경력이 끝난 후에는 특히 가르침과 작곡에 몰두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서 성공을 거둔 후 목소리가 상해 1863년, 42세의 나이로 무대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폴린에게는 충분한 열정과 프로젝트가 있어 계속 활동하며 음악적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루이 비아르도와 이반 투르게네프가 세상을 떠난 후, 폴린은 파리 생제르망 대로로 이주했다. 그녀는 가르침, 젊은 예술가 후원, 작곡, 그리고 손주들에게 헌신했다. 그녀의 오페라 『신데렐라』는 1904년, 그녀가 83세였을 때 공연되었다. 그녀는 1910년 5월, 8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비극 배우의 재능을 지닌 가수이자 위대한 음악적 유산을 후세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