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디안 드 푸아티에, 프랑스 왕을 움직인 유능한 관리자이자 영향력 있는 여주인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정부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 1499년 또는 1500년 ~ 1566년)는 무려 20년 동안 국왕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입니다.

도팽 앙리와의 운명적인 만남

디안 드 푸아티에, 프랑스 왕을 움직인 유능한 관리자이자 영향력 있는 여주인디안은 에투아유 자작이자 생발리에 영주였던 장 드 푸아티에(Jean de Poitiers)와 1506년에 세상을 떠난 잔 드 바르나이(Jeanne de Batarnay)의 외동딸로, 프랑스의 공주이자 섭정이었던 안 드 보쥬(Anne de Beaujeu)의 보호 아래에서 성장했습니다.

1515년, 안 드 보쥬는 당시 15세였던 디안을 샤를 7세와 아녜스 소렐의 손자이며 그녀보다 거의 40살 연상인 루이 드 브레제(Louis de Brézé)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딸이 태어났습니다.

1524년, 그녀의 아버지 장 드 푸아티에는 부르봉 대원수의 반역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이 음모를 국왕에게 미리 알린 사위 루이 드 브레제의 공로를 인정받아 처형대 위에서 간신히 사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로슈 요새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클로드 왕비의 시녀가 되었고, 이후 국왕의 모후 루이즈 드 사부아, 그리고 엘레오노르 왕비의 시녀로도 근무했습니다.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그의 석방 조건으로 프랑스의 두 도팽 프랑수아와 앙리(훗날의 앙리 2세)가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에게 인질로 넘겨졌습니다. 두 형제는 거의 4년에 걸친 억류 생활을 보냈습니다. 당시 31세였던 디안은 스페인으로 떠나는 11세 앙리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건네준 사람이었으며, 앙리가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는 왕자의 궁정 교육을 직접 맡게 되었습니다.

영향력을 행사한 정부

1531년 7월 23일 남편 루이 드 브레제가 세상을 떠나자, 디안 드 푸아티에는 상복을 입고 유족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변호사들을 적극적으로 곁에 두고 뛰어난 재정 수완을 발휘하며 자신의 권익을 지키고 재산을 불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능숙한 협상가였던 그녀는 남편이 노르망디 총독 겸 대섀셜(Grand Sénéchal)로서 받던 급여를 그대로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 스스로 '노르망디 여섀셜(Sénéchale de Normandie)'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딸들의 재산을 직접 관리하고 그 수입까지 징수했습니다.

1533년, 앙리 2세는 디안이 지지했던 선택대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1538년, 디안은 도팽 앙리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지적이고 교양이 풍부하며 정치적 감각까지 갖춘 인물이었던 그녀는 앙리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궁정에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였습니다. 프랑수아 1세가 서거하자 디안은 1548년 발렌티누아 여공작에 임명되었고, 이어 1553년에는 에탕프 여공작이 되었습니다. 앙리 2세는 그녀에게 끊임없는 명예와 부를 안겨주었으며, 국왕이 사망할 때까지 디안은 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559년, 앙리 2세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으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디안이 국왕의 병상을 문병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나아가 장례식 참석까지 금지시켰습니다. 섭정이 된 카트린은 앙리 2세가 디안에게 하사했던 왕관 보석들과 승노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영향력을 완전히 잃은 디안 드 푸아티에는 아네(Anet) 성으로 물러나 1566년 그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