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브라우넬 앤서니(Susan Brownell Anthony, 1820~1906)는 미국의 시민권 운동가로, 여성 참정권 운동에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초기 페미니즘 활동
루시 리드(Lucy Read)와 다니엘 앤서니(Daniel Anthony) 사이 일곱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난 수잔은 1820년 2월 15일 매사추세츠주 웨스트그로브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자녀 교육에 엄격했지만 동시에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녔으며, 특히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였습니다.
조숙한 아이였던 수잔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습니다. 한 교사가 그녀의 성별을 이유로 수학을 가르치기를 거부하자, 아버지는 직접 집에서 딸의 교육을 이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미 활동가의 기질을 보이던 수잔은 1836년, 16세의 나이에 하원이 청원이라는 압박 수단을 금지하자 노예제 반대 청원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1837년에는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학교에 입학했지만, 같은 해 닥친 금융 위기로 가문이 몰락하면서 학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1839년 가족이 뉴욕주로 이주한 후, 수잔은 집을 떠나 교사로 일하며 부모를 경제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846년에는 카나조하리 아카데미(Canajoharie Academy) 여학교 부장으로 임명되어, 남녀 동일 임금을 요구하는 자신만의 첫 번째 페미니즘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여성과 흑인의 권리 옹호
1849년 수잔 B. 앤서니는 교직을 그만두고 술 소비에 반대하는 금주 운동 단체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딸러스 오브 템퍼런스(Daughters of Temperance)'의 서기로 선출되었습니다. 페미니즘 운동가 루시 스톤(Lucy Stone)에게 깊은 영감을 받은 그녀는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친구인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Elisabeth Cady Stanton)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성평등을 촉구하는 강연 무대에 섰고, 1856년에는 미국 반노예제 협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에 합류하여 두 개의 투쟁을 하나로 연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868년 1월 1일, 수잔은 주간지 The Revolution을 창간하여 여성과 흑인의 권리, 특히 선거권 확보를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이 신문은 동일 임금, 이혼 제도, 여성이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할 권리 등 당대 금기시되던 주제들도 과감히 다루었습니다. 1869년에는 엘리자베스 스탠턴과 함께 여성의 선거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전국여성참정권협회(National Woman Suffrage Association, NWSA)를 설립했으며, 초대 부회장을 거쳐 1892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투표 혐의로 체포되다
1872년 11월 18일, 수잔 B. 앤서니는 열흘 전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그녀는 법정에서 일련의 법적 논변을 펼쳤지만, 결국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판사에게 "법정님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 불공정한 벌금을 단 한 달러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끝까지 벌금을 납부하지 않았으며 당국 역시 이를 강제로 징수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수잔은 미국 전역과 유럽을 오가며 쉼 없이 강연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여성 참정권을 위해 활동하던 여러 단체의 통합을 추진했고(성공 여부는 고저가 있었지만), 방대한 기록물인 여성 참정권의 역사(History of Woman Suffrage)를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900년, 80세의 나이로 공식 은퇴했습니다.
1906년 3월 13일, 미국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헌법 수정 제19조가 채택되기 14년 전, 수잔 B. 앤서니는 심장 질환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생전에 이루지 못한 투쟁의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사후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 헌액되며 그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