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의 앤(Anne of Brittany, 1477~1514)은 브르타뉴 공작부인이자 프랑스 왕비가 된 인물로, 오늘날 브르타뉴에서는 지역을 수호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브르타뉴 공작부인
앤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는 1477년 1월 낭트에 위치한 브르타뉴 공작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마르그리트 드 푸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그녀는 가정교사의 손에서 자라며 귀족 교육을 받았습니다. 읽고 쓰는 법은 물론 춤과 노래도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프랑수아 2세에게는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1486년 브르타뉴 삼부회를 통해 딸 앤을 공국의 정식 상속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아울러 프랑스 국왕에 맞서 저항하던 그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앤의 혼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1488년,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국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굴욕적인 조약 체결을 강요당했습니다. 이 조약에는 '공작은 프랑스 국왕의 동의 없이 딸의 혼인을 결정할 수 없다'는 조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며칠 뒤 프랑수아 2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프랑스와 브르타뉴 사이에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490년, 공작부인이 된 앤은 당시 로마왕이던 막시밀리안 1세(훗날 신성로마 제국 황제)와 대리 결혼을 진행했는데, 이는 해당 조약의 명백한 위반이었습니다.
프랑스 왕국과의 화해
1491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앤이 머물던 렌을 포위하고 이 결혼의 파기를 강요했습니다.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앤은 1491년 12월 6일 샤를 8세와 정식으로 결혼했고(막시밀리안과의 혼인은 교황에 의해 무효 처리됨), 이로써 프랑스 왕비가 되었습니다. 혼약에는 브르타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 간의 평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으며, 샤를 8세는 아내에게 브르타뉴 공작부인 칭호의 사용마저 금지했습니다. 열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앤은 시가의 의심 속에서 정치 일선에서 멀어졌고, 잦은 임신과 출산에 시달렸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공국의 수복
1498년 샤를 8세가 사망하자, 앤은 즉시 브르타뉴 공국의 통치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녀는 삼부회를 소집하고 자신의 초상이 새겨진 화폐를 발행하는 등 실질적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소녀였던 앤은 이제 더 이상 칭호를 빼앗기거나 타인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성숙한 여성으로 거듭나 있었습니다. 혼약 조건상 남자 상속자가 없을 경우 샤를 8세의 후계자와 재혼해야 했기에, 그녀는 예전부터 자신의 동맹이자 친구, 구혼자였던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번 혼약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앤은 브르타뉴 공작부인의 칭호와 공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루이 12세는 브르타뉴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조항까지 명시되었습니다. 앤은 생이 다할 때까지 브르타뉴에 대한 주권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탁월한 후원가이기도 했던 앤 드 브르타뉴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와 시인들을 곁에 두며 예술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이탈리아 예술의 열렬한 애호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수차례의 임신과 출산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된 앤은 1514년, 불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고 자료
앤 드 브르타뉴의 위키피디아 페이지
브르타뉴 공작부인이자 두 차례 프랑스 왕비가 된 앤 드 브르타뉴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