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72. 파텔과 네루가 거절한 간디의 파키스탄 양보 제안

72. 파텔과 네루가 거절한 간디의 파키스탄 양보 제안

무함마드 알리 지나는 파키스탄 건국을 위해 필사적으로 몰부었고, 그 이상의 타협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뜻이었다. 그러나 간디와 마울라나 아불 칼람 아자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도를 분할해 지나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마운트배튼 총독은 통일된 '아칸다 바라트'에 통치권을 넘기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두 나라에 권력을 나누어 주며 파키스탄을 지나에게 할양할 것인가를 좀처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마운트배튼은 두 가지 사항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했다. 첫째, 영국군과 영국 관리들이 가족과 함께 안전하게 인도를 떠나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종교 간 폭동이 인도 전역으로 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수천만 명의 무고한 인도인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진다면 그 책임은 영국에 돌아갈 것이었다. 총독의 직위와 명예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 무렵 마운트배튼의 부인 에드위나는 폭동으로 유린된 인도의 현장을 직접 시찰했다. 폭동 희생자들의 시신을 목격한 에드위나는 극심한 충격에 빠졌다. 현장에서 돌아온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인도 국민회의는 절대 인도 분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이 수천만 명 살해의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라도 인도를 분할해야 하며 국민회의 지도자들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에드위나의 의견에 무게를 실은 마운트배튼은 간디, 네루, 파텔과 인도 분할 문제를 논의했다. 간디는 어떤 경우에도 인도 분할을 원하지 않았다. 1947년 3월 3일 간디는 "인도의 분할은 내 시신 위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파텔과 네루는 격화되는 종교 폭동을 앞두고 분할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수용하는 입장으로 기울었다.

이에 간디는 마운트배튼과 여섯 차례 회담을 가졌고, 총 소요 시간은 무려 14시간에 달했다. 래리 콜린스와 도미니크 라피에르는 저서에서 "간디는 마운트배튼에게 몇 번이고 인도를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간디는 분할을 막기 위해 옛 솔로몬 왕의 지혜와 같은 발상까지 내놓았다. 아이를 둘로 나누어 자르지 말라는 판결처럼, 아예 나라 전체를 지나에게 넘겨주자는 것이었다.

"지나가 무슬림 연맹을 이끌고 정부를 구성하게 하라. 나라의 3억 시민을 모두 다스리게 하라." 이 제안에 마운트배튼은 "당신이 이 방안에 대해 국민회의의 공식 승인을 받아낼 수 있다면, 나 역시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했다.

마운트배튼과의 회담을 마친 간디는 곧바로 네루와 파텔을 찾아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간디의 제안에 강경히 반대했고, 제안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1947년 6월 3일, 마운트배튼은 인도 분할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지나는 기뻐서 펄쩍 뛰었다. 평생의 실패 끝에 그는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