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애닝(Mary Anning, 1799~1847)은 영국의 고생물학자이자 화석 수집가로, 지구의 선사 시대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넓힌 중요한 발견들로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라임 레지스의 절벽
1799년 5월 21일,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라임 레지스(Lyme Regis)에서 태어난 메리는 '몰리'로 불린 메리 무어(Mary Moore)와 가구 장인 리처드 애닝(Richard Anning)의 딸입니다. 아버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주변 절벽에서 찾은 화석을 수집해 되파는 일을 병행했습니다. 메리는 열 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지만, 성인까지 살아남은 것은 단 두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린 시절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메리 자신도 생후 15개월 무렵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웃 여성이 그녀를 품에 안고 나무 그늘에 서 있던 순간 벼락이 나무를 강타해 세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메리만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의사는 그녀의 생존을 기적이라 선언했고, 마을 사람들은 훗날 그녀의 두려움 없는 호기심과 총명함, 활발한 성격을 이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메리는 학교에 다니며 읽고 쓰는 법을 배웠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교육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식량 부족과 물가 상승이 이어지던 힘든 시기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리처드는 종종 메리와 오빠 조지프(Joseph)를 데리고 라임 레지스 절벽으로 화석 채집에 나섰습니다. 이 해안은 암모나이트와 벨렘나이트가 특히 풍부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화석에 약효가 있다고 믿기도 했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에게 쉽게 팔 수 있었습니다. 겨울철에는 폭우로 인한 산사태가 절벽을 위험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화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애닝 가족은 그런 위험 속에서도 꾸준히 절벽을 찾았습니다.
어룡(魚龍)의 발견
1810년 리처드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은 빚더미에 앉게 됩니다. 몰리와 당시 열네 살, 열한 살이던 조지프와 메리는 화석 채집과 판매에 전념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듬해인 1811년, 조지프와 메리는 먼저 두개골을 발굴하고, 이어 어룡(Ichthyosaur) 골격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이 골격은 지역 귀족에게 팔렸다가 다시 저명한 수집가에게 넘어가 런던에서 전시되었는데, 창세기가 가르쳐지고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였기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애닝 가족에게는 정기적인 고객이 생겨났고, 그중에는 토머스 제임스 버치(Thomas James Birch) 중령도 있었습니다. 1820년, 1년 넘게 큰 발견 없이 다시 빚에 시달리던 가족을 위해 버치는 그들에게서 산 화석들을 경매에 내놓고 수익의 일부를 건넸습니다.
이후 조지프는 실내 장식공 견습생이 되었고, 메리 애닝은 가업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녀는 흔한 암모나이트와 벨렘나이트를 몇 실링에 팔았고, 훨씬 드물고 값비싼 척추동물 뼈도 거래했습니다. 1823년에는 최초의 플레시오사우루스(Plesiosaurus, 쥐라기의 대형 해양 파충류)를, 1828년에는 프테로사우루스(Pterosaur, 삼첩기 후기의 비행 파충류)를 발견했습니다. 손에 닿는 모든 과학 문헌을 탐독하고 하루 종일 절벽에서 화석을 찾으며 메리는 방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녀는 화석을 즉시 식별할 수 있었고, 저명한 학자들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학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발견이 이어질수록 명성도 높아져, 1826년에는 충분한 돈을 모아 가게 창문이 달린 집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화석 수집가들은 물론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Frederick Augustus II)까지 그녀의 가게를 방문해 표본을 구매하러 왔습니다.
메리와 과학계
절벽에서의 화석 채집, 특히 겨울철 채집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습니다. 1833년 10월, 메리 애닝은 산사태에 휩쓸려 거의 죽을 뻔했고, 그녀의 반려견 트레이(Tray)는 이 재난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도 점차 깊어졌습니다. 1839년에는 『자연사 잡지(Magazine of Natural History)』에 편지를 보내 선사 시대 상어 화석에 관한 오류를 지적했고, 잡지는 그 편지의 일부를 게재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출판이 되었습니다.
하층민 출신 여성이었던 메리는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의 회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학식과 지식을 갖추었어도, 그녀의 발견들은 남성 학자들에 의해 출판되었고 그들은 종종 그녀의 공로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메리는 분개했지만, 학회에 들어갈 수 없는 대신 많은 지질학자들이 그녀를 직접 찾아와 분류나 해부학에 대해 토론하고 함께 화석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헨리 드 라 보셰(Henry De la Beche), 윌리엄 버클랜드(William Buckland),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 등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1835년에는 잘못된 투자로 저축 대부분을 잃으면서 또다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친구 윌리엄 버클랜드는 영국 과학협회와 정부를 설득해 그녀가 연금을 받도록 했고, 덕분에 메리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846년 메리는 병을 앓았고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질학계는 그녀의 치료비를 돕기 위해 성금 모금 활동을 벌였습니다.
메리 애닝은 1847년 3월 9일, 유방암으로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친구이자 지질학회 회장이었던 헨리 드 라 보셰는 추도사를 써서 학회 모임에서 낭독했는데, 이는 당시 남성에게만 허용되던 영예였습니다. 추도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잃은 이들을 기리는 이 글을, 노동으로 일상의 빵을 벌어야 했고 설령 사회의 특권 계층에 속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녀의 재능과 지칠 줄 모르는 연구를 통해 라임 레지스 인근에 묻힌 거대한 에날리오사우루스류(Enalio-Saurians) 및 기타 생명체의 형태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적지 않게 기여한 한 사람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맺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