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 파트마 은수메르(Lalla Fatma N'Soumer, 1830~1863)는 1850년대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에 맞서 싸운 카빌(Kabyle) 여성입니다. 그녀는 오늘날 알제리에서 독립 정신과 여성적 용기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코란 학교에서 성장한 소녀
파트마 은수메르는 1830년 알제리 북부 오트 카빌리(Haute Kabylie) 지방의 베르자(Werja) 마을, 즉 카빌어로 '아티 부 유세프(At Bu Yusef)'라 불리는 현재의 아비 유세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에게는 네 명의 오빠가 있었고, 아버지는 코란 학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알제리 전쟁 발발 3년째로, 프랑스는 알제리 식민지화를 위한 무력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알제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 침략은 빠르게 국토 전역, 특히 카빌리아 지방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파트마는 이러한 격변의 시대 속에서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식민 침략자들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키워갔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아버지는 파트마에게 결혼을 강요하려 했으나 그녀는 끝내 거부했습니다. 결국 사촌과 강제로 혼인하게 되자, 파트마는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기도에 몰두했고, 가족이 그녀를 부모 곁으로 돌려보낼 때까지 이를 지속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파트마는 수메르(Soumer)에서 코란 학교를 운영하던 오빠 시 타이엡(Si Tayeb)에게 합류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파트마 은수메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오빠의 학교 운영을 도왔습니다. 특히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고, 지역 사회에서 훌륭한 평판을 얻게 됩니다. 그녀는 수피즘 이슬람 교단인 라흐마니야(Rahmaniya) 형제단 소속이었으며, 일종의 예언자로서 존경받았다고 전해집니다.
프랑스군과의 항쟁
프랑스 군대가 주르주라(Djurdjura) 산맥, 즉 카빌리아 북부의 산악 지대에 진입하자, 모함메드 람자드 벤 압델말렉(Mohammed Lamjad ben Abdelmalek), 통칭 '셰리프 부바글라(Cherif Boubaghla)'가 카빌 민중 대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라라 파트마 은수메르는 즉시 이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처음에는 반군에게 필요한 식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점차 국토 방어에 직접 참여하기에 이릅니다.
그녀는 직접 무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군대를 격려하고 규합하며 전투로 이끄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작전 회의에도 참여해 전략 수립에 기여했고, 남성만 출입할 수 있던 회의에까지 출석할 정도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그녀는 나이나 지위가 높은 여성에게만 허용되는 명예 칭호인 '라라(Lalla)'를 얻게 됩니다.
1854년 셰리프 부바글라가 전사하자, 파트마는 저항의 깃발을 이어받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증원을 요청하면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1857년, 카빌 반군은 35,000명에 달하는 대군과 마주하게 됩니다. 파트마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했지만,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1857년 7월 27일, 그녀는 체포되어 수감된 후 연금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체포와 함께 저항 운동도 와해되었고, 주르주라 전역은 막을 내렸습니다.
라라 파트마 은수메르는 1863년, 33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날 그녀는 알제리 독립운동의 선구자이자 식민주의에 맞선 여성 저항의 상징으로 길이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