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왕대비, 그리고 섭정. 라보치베니 음들리, 일명 '그와밀레'(1859년경~1925)는 유럽 정착민들이 남아프리카를 잠식해 가던 격동의 시대에 스와질란드 왕국을 다스리고 끝까지 지켜낸 인물입니다.
꺾이지 않는 자, '그와밀레'
마찬자나 음들리의 딸로 태어난 라보치베니 음들리는 1859년경 스와질란드 북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음스와티 2세의 통치기로, 보어인·영국인·포르투갈인이 남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며 원주민들과 격렬한 충돌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보어 정착민들은 스와질란드의 비옥한 땅에 큰 욕심을 보였고, 이로 인해 1852년부터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라보치베니는 음스와티 2세의 어머니인 왕대비 찬질레 은드완드웨의 후견 아래 놓였습니다. 숙부 멸라세 음들리와 함께 그녀는 스와질란드 북부의 왕실 마을 루지진니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궁정을 가까이 관찰하며 정치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1868년 음스와티 2세가 사망하자 왕대비 찬질레 은드완드웨가 왕국을 통치하는 섭정 시대가 열렸습니다. 장남 루드본가 2세가 왕위를 이을 예정이었지만, 즉위 전에 독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동생 음반제니가 1875년 들라미니 4세로 즉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 성격 탓에 '그와밀레(꺾이지 않는 자)'라는 별명을 얻은 라보치베니는 새 왕의 아내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슬하에 딸 통고통고와 세 아들 부누, 말룬게, 롬바지를 두었습니다.
은들로부카지, 왕대비가 되다
1880년대 바버턴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유럽 정착민들이 스와질란드로 몰려들었습니다. 정복 군주 음스와티 2세 치세에 최대의 영토 확장을 이루었던 스와질란드는, 들라미니 4세의 무분별한 통치 아래 위기를 맞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토 안에 보어 공화국인 '클라인 프라이스타트(작은 자유국)'의 건국을 허용했고, 서로 상충되고 일관성 없는 토지 양도권과 독점권을 남발하여 수많은 분쟁과 신민들의 이탈을 초래했습니다.
1889년 왕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장남 부누가 응와네 5세로 즉위했고, 라보치베니 음들리는 왕대비 '은들로부카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섭정직은 들라미니 4세의 어머니인 선대 왕대비 티바티가 맡고 있었습니다. 라보치베니는 점차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두 여왕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다가 1895년 티바티가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사실 라보치베니는 이미 두 사람 중 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해 있었습니다. 1894년에는 스와질란드 제3차 협약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어 스와질란드를 트란스발의 보호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왕대비의 권위는 스와질란드 왕실 문장에 코끼리로 상징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 응와네 5세의 행보는 이 권위를 시험대에 올렸습니다. 살인 혐의를 받은 그는 동생 말룬게와 함께 도피하여 감옥은 피했지만 스와질란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무혐의 판결을 받았음에도 최고 추장으로서의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보어 전쟁과 섭정의 시작
1899년 보어인과 영국인 사이에 제2차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스와질란드에서 철수하며 통치권을 응와네에게 반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달 만에 사망하고 맙니다. 라보치베니 음들리는 이후 생후 6개월이 된 손자 모나, 훗날 소부후자 2세로 즉위하는 아이의 섭정을 맡았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라보치베니는 스와질란드가 대영제국의 일부였음에도 왕국의 중립을 지키고 양측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썼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섭정과 그녀의 평의회는 스와질란드가 영국 보호령이 되기를 원했지만, 실제로 드리운 그림자는 트란스발에 의한 통치였습니다. 라보치베니는 항의하고, 사절단을 파견하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결국 이 영토는 베추아날랜드와 바수톨랜드의 영국 총독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들라미니 4세가 재위 기간에 남발한 수많은 양도권에서 비롯된 분쟁은 계속 문제가 되었고, 결국 라보치베니가 반대했지만 무위로 끝난 토지 분할로 이어졌습니다. 토지의 3분의 1은 영국 왕실에, 또 3분의 1은 개인 정착민에게, 나머지 3분의 1만이 스와지 민족에게 돌아갔습니다.
섭정으로서의 마지막 행보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영국 왕실의 자치령으로 출범했습니다. 스와질란드는 물론 바수톨랜드와 베추아날랜드도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백인 정착민의 손에 넘어간 강대한 이웃의 부상을 우려한 섭정은 흑인 공동체를 대표하기 위한 정치 조직인 '남아프리카 원주민 국민회의(South African Native National Congress)'를 지원하고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이 단체는 훗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전신이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라보치베니 음들리는 스와지 청년들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신 전쟁 노력에 재정적으로 기여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라보치베니는 특히 미래의 국가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을 중시했으며, 왕위를 계승할 손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손자를 여덟 명의 청년과 세 명의 여성과 함께 남아프리카 앨리스의 러브데일 학교에 보냈습니다.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그녀는 손자를 학교에서 데려왔고, 1921년 12월 마침내 왕관을 물려주었습니다.
라보치베니 음들리는 1925년 12월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