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여성 권리의 선구자, 푼밀라요 랜섬 쿠티(Funmilayo Ransome Kuti)

푼밀라요 랜섬 쿠티(Funmilayo Ransome Kuti, 1900~1978)는 나이지리아의 정치가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입니다. 그녀는 특히 나이지리아의 독립, 여성 참정권, 그리고 여성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헌신적인 교사

여성 권리의 선구자, 푼밀라요 랜섬 쿠티(Funmilayo Ransome Kuti)

푼밀라요는 루크레티아 필리스 오모예니 아데오솔루(Lucretia Phyllis Omoyeni Adeosolu)와 다니엘 올루메유와 토머스(Daniel Olumeyuwa Thomas) 사이에서 프랜시스 애비게일 올루펀밀라요 토머스(Francis Abigail Olufunmilayo Thomas)라는 이름으로 1900년 10월 25일 나이지리아 아베오쿠타(Abeokuta)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요루바(Yoruba) 민족에 속한 에그바(Egba) 부족 출신으로, 어머니는 재봉사였고 농장주였던 아버지는 시에라리온 출신 전 노예의 후손이었습니다.

푼밀라요는 아베오쿠타 문법학교(Abeokuta Grammar School)에 입학하여 이 학교 최초의 여학생이 되었습니다. 이후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잉글랜드에서 유학하며 학업을 마쳤고, 이 시기에 반식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나이지리아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베오쿠타 여자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이 무렵 프랜시스 애비게일이라는 세례명을 버리고 요루바식 이름만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영어 대신 요루바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1925년, 푼밀라요는 인권 옹호자이자 나이지리아 교사연합(Nigerian Union of Teachers)과 나이지리아 학생연합(Nigerian Union of Students)의 창립자인 이스라엘 올루도툰 랜섬쿠티(Israel Oludotun Ransome-Kuti) 목사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아베오쿠타 여성연합(AWU)

1942년, 푼밀라요 랜섬 쿠티는 자선 및 페미니즘 단체인 '아베오쿠타 레이디스 클럽(Ladies' Club of Abeokuta)'을 창설합니다. 초기 이 모임은 식자층 중산층 여성들로 구성된 엘리트 성향의 단체였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아베오쿠타 여성연합(Abeokuta Women's Union, AWU)'으로 개편되면서 배타성을 버리고 가난한 상인, 문맹 여성 등 소외 계층까지 회원을 넓혀갔습니다. 푼밀라요는 수천 명의 AWU 회원들이 식민 당국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야간 강좌와 워크숍을 직접 조직했습니다.

이후 AWU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활동에 나섭니다. 연합은 여성 상인에 대한 세금, 징발과 부패에 반대하고, 여성의 참정권과 정치적 대표성 확보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AWU 회원은 물론 비회원 여성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운동은 시장 폐쇄, 좌입 시위, 집회, 여성세 납부 거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당국을 압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푼밀라요는 한동안 투옥되기도 했지만, 석방 후에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나이지리아 여성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켰습니다. 마침내 1949년, 수년간의 투쟁 끝에 AWU는 여성 상인 세금 폐지를 쟁취해냈고, 이후 나이지리아 여성연합(Nigerian Women's Union)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독립

여성 권리의 선구자, 푼밀라요 랜섬 쿠티(Funmilayo Ransome Kuti)

푼밀라요 랜섬 쿠티는 조국의 독립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녀는 여러 차례 해외를 방문하며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1960년에 이루어진 나이지리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냉전기에 모스크바와 베이징 등을 오간 그녀의 잦은 해외 여행은 당국의 주목을 받았고, 일부 국가에서는 비자 발급이 거부되거나 소지한 비자가 압수되기도 했습니다.

푼밀라요는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국민평의회(National Council of Nigeria and the Cameroons, NCNC)에 입당하며 정치에 도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명당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커머너스 인민당(The Commoners' People's Party)'을 창당했으나 이 정당 역시 다음 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비아프라 전쟁과 연이은 군사 쿠데타로 혼란이 이어지던 시기, 푼밀라요의 아들이자 음악가인 펠라 쿠티(Fela Kuti)는 부패와 독재에 맞서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1976년 반군주의 앨범 《좀비(Zombie)》를 발매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8년 군부의 습격이 그녀의 거처를 덮쳤습니다. 푼밀라요는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군인들에게 창밖으로 던져지는 만행을 당했습니다. '여성 권리의 어머니'라 불린 푼밀라요 랜섬 쿠티는 그로부터 몇 달 뒤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