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4. 비상사태 때 해고된 공무원들을 복직시킨 셰카와트

4. 비상사태 때 해고된 공무원들을 복직시킨 셰카와트

비상사태 기간 동안 수많은 공무원들이 정부 직에서 해고되었습니다. 비론 싱 셰카와트는 가난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비상사태 기간에 해고된 모든 직원들을 복직시켰을 뿐만 아니라, 구금되어 있던 기간 동안의 재정적 혜택까지 전액 지급했습니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저명인사들은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많은 평범한 시민들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셰카와트 정부는 이들 모두를 석방시켰습니다.

칸싱 파리하르 판사 위원회 구성

비상사태 기간 동안 일부 정부 공무원들이 국민에게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셰카와트 정부는 라자스탄 고등법원 은퇴 판사 칸싱 파리하르를 위원장으로 하는 단독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위원회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민원이 쇄도했습니다. 민원 내용은 비상사태 중의 강제 불임수술, 강제 퇴직, 부당한 구금, 그리고 '불법 점유'라는 명목으로 합법적 건축물을 철거한 사건 등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파리하르 판사는 이 방대한 민원을 분류하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500건의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일부 보고서에만 조치할 수 있었고, 나머지를 처리하기도 전에 주에 다시 대통령 통치가 선포되고 말았습니다.

'반야 자리나 구해라'라던 어머니

주 총리가 된 후 셰카와트는 사무국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도대체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시간에 집에 오지 않고, 밥도 제때 먹지 않으니까요. 어느 날 어머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총리가 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런 직업을 가졌으니 먹을 때도 못 먹고 잘 때도 못 자네. 그만두고 반야(상점 주인) 자리나 하나 얻어라."

항의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스스로 등장하다

어느 날 자나르단 싱 게홀롯이 셰카와트 정부에 대한 조치를 논의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일부 지도자들과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셰카와트 내각의 각료와 의원 일부도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셰카와트는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꾸짖었습니다. "왜 나를 초대하지 않았나? 나도 가겠네." 그리고 30분 만에 셰카와트는 자나르단 싱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결국 자나르단 싱의 계획 전체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빈곤을 몸소 겪은 지도자

셰카와트 자신도 빈곤의 고통을 몸소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가난한 이들의 삶을 끌어올리는 일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으며, 라자스탄에 모범 마을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연설에서 자주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민주주의의 다섯 번째 기둥으로 세워, 국가 자원에 대한 그들의 최우선권을 확립해야 한다."

안티요다이 계획의 아버지

셰카와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안티요다이(Antyodaya) 계획을 수립하여 라자스탄에서 처음으로 시행했습니다. 이 계획의 초기 내용에는 각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5개 가구를 선정하고, 축산·소공업·낙타 사육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위해 은행에서 저금리 대출을 받도록 지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이 계획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통합 농촌 개발 계획의 핵심 축이 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체의 한 부분에 이상이 생기면 온몸에 영향을 미치듯, 사회 어디든 이상이 생기면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유엔 역시 이 계획을 높이 평가했으며, 오늘날에도 인도 정부는 이를 중앙 정부 지원 사업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록펠러'

안티요다이 계획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당시 세계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 계획을 극찬하며 셰카와트를 '인도의 록펠러'라고 불렀습니다.

세계은행도 지원에 나서다

라자스탄 주 총리로서 셰카와트는 '아프나 가온–아프나 카암(내 마을, 내 일)' 계획과 '일을 위한 식량(Food for Work)'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이 계획들은 빈곤 퇴치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후 중앙 정부의 지시에 따라 안티요다이 계획은 '일을 위한 곡물' 계획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라자스탄은 다른 모든 주보다 앞선 성과를 거두며 18만 톤의 곡물을 확보했습니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세계은행도 해당 계획 운영을 위해 주정부 지원에 적극 나섰습니다.

판차야트에 실질적 권한 부여

당시까지만 해도 판차야트(지방 자치 단체)가 직접 집행할 수 있는 예산은 500루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셰카와트의 첫 번째 정부는 이 한도를 5만 루피로 상향했으며, 각 판차야트 사미티의 건설 사업 집행 한도도 100만 루피로 늘렸습니다.

바라티야 잔타당(BJP) 창당

1980년 잔타당이 분열되었습니다.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L.K. 아드바니, 그리고 비론 싱 셰카와트는 함께 바라티야 잔타당(BJP)을 창당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BJP의 창당 멤버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대통령 통치

1980년 1월, 중앙에 인도 국민회의(U) 정부가 들어섰고, 같은 해 2월 17일 셰카와트 정부를 해임하며 입법의회까지 해산했습니다. 이로써 라자스탄에는 세 번째로 대통령 통치가 선포되었습니다. 셰카와트 정부의 첫 임기는 2년 8개월이었습니다.

입법의회 야당 대표

1980년 주의회 선거에서 셰카와트는 차브라 선거구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소속 정당은 패배하여 국민회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셰카와트는 BJP 교섭단체 대표로 선출되어 야당 대표가 되었고, 5년 내내 이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두 선거구에서 모두 승리, 다시 야당 대표로

1985년 제8대 라자스탄 입법의회에서도 국민회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 선거에서 셰카와트는 님바헤라와 아제르 두 개 선거구에 동시 출마하여 두 곳 모두에서 승리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의회에서도 그는 야당 대표로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사티 관습에 대한 강력한 반대

1987년 9월 4일, 시카르 지구 디발랄라 마을에서 루프칸와르 사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과 규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하리데브 조시 주 총리는 사티 관습을 종식시키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1987년 11월 2일, 셰카와트는 라자스탄 입법의회에서 이 악습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지난 150년간 주에서 사티를 행한 여성들의 데이터를 직접 수집하여, 사티가 라지푸트족에만 국한된 관습이라는 통념이 환상임을 입증했습니다. 실제로 지난 150년간 라지푸트 여성보다 다른 카스트의 여성들이 더 많이 사티를 행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주장은 명확했습니다. 이 악습을 뿌리째 뽑기 위해서는 실효성 있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