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라바드는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인도 연방에 가담하지 않았던 두 토후국 중 하나였습니다.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은 서기 1720년 무굴 제국의 총독(수베다르) 친퀼리지 칸이 세웠습니다. 그는 스스로 '니잠울물크(Nizam-ul-Mulk)'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하이데라바드의 통치자는 '니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1798년에는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이 동인도 회사와 원조 조약(종속 동맹)을 체결하며 영국 세력 아래 들어갔습니다.
인도 최대·최고(最富)의 토후국
영국 정부는 하이데라바드 니잠에게 21발 예포의 최상급 예우를 부여했습니다. 인도 독립 당시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의 면적은 약 21만 4,190제곱킬로미터로, 프랑스와 맞먹는 크기였습니다. 인구는 약 1,634만 명에 달했으며, 오늘날 마하라슈트라, 카르나타카, 안드라프라데시 주에 해당하는 영토들이 모두 이 나라에 속해 있었습니다.
주나가르드와 마찬가지로 하이데라바드의 통치자도 무슬림이었지만, 주민의 85%는 힌두교도였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문제는 하이데라바드 주가 사방이 인도 영토로 둘러싸인 내륙 월경지였다는 점입니다.
하이데라바드의 마지막 니잠인 오스만 알리 칸 아시프 자 7세는 아들 28명과 딸 44명을 두었으며, 금과 다이아몬드, 보석 수집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독재와 특권으로 유지된 통치
니잠은 민주주의를 타락한 제도로 치부하고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토후국의 모든 통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그 휘하의 관료들 역시 교활하고 탐욕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국가의 모든 공직은 오직 무슬림에게만 열려 있었습니다.
1947년 하이데라바드에 입법 의회가 구성되었는데, 무슬림에게 48석, 힌두교도에게 38석을 배정하여 무슬림 백성('리야야')의 권리에 반하는 법률이 절대 만들어질 수 없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의회에는 심지어 니잠 본인이라 할지라도 무슬림 백성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독립국가를 꿈꾼 니잠의 야욕
니잠은 광대한 영토, 축적된 부, 영국 통치자들과 대대로 이어온 유착 관계, 그리고 거대한 군사력을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나 파키스탄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고 하이데라바드를 독립국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동인도 회사 및 영국 왕실과 시기별로 체결해 온 조약들을 근거로, 하이데라바드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1946년 3월 15일 영국 총리 애틀리가 인도인들의 자기결정권 수용을 선언하자, 니잠은 바로 그때부터 자신의 국가를 독립국으로 승인받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니잠은 마운트배튼 경을 자신의 친구로 여겼고, 마운트배튼이 인도와 파키스탄과는 별개의 자치령(Dominion)으로 하이데라바드를 승인받는 데 힘을 보태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데라바드가 이처럼 독자적인 길을 걷자, 사르다르 파텔은 결국 "하이데라바드는 인도의 배 속에 박힌 종기와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