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6년, 간디의 결정과 사르다르 파텔의 양보
1946년 인도 국민회의(콩그레스) 당수 선거는 인도 근대사의 큰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전국 16개 지방 위원회 가운데 무려 13개가 사르다르 발라브하이 파텔을 당수로 추천했고, 2개는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를, 1개는 마하트마 간디 자신을 지명했습니다. 압도적인 지지가 파텔에게 쏠린 상황이었지만, 간디는 파텔 대신 자와할랄 네루를 당수로 임명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은 회의 내부에서조차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과거에도 반복된 '역선택'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간디는 과거에도 네 차례에 걸쳐 비슷한 방식으로 흐름을 거스른 바 있습니다.
1927년에는 파텔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그 자리는 무크타르 아메드 안사리에게 돌아갔습니다. 1929년에는 네루가 파텔을 제치고 당수로 선출되었고, 1936년에도 다시 네루가 당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1939년에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이름으로 추천이 올라왔으나, 간디는 파타비 시타라마이야를 후보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보스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간디는 "시타라마이야의 패배는 곧 나의 패배"라며 사실상 회의와 거리를 두었고, 결국 보스는 갈등 속에서 회의를 떠나게 됩니다.
총리 자리로 직결된 1946년의 선택
1946년의 당수 선거가 특별했던 이유는, 몇 달 뒤 인도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체계상 총독은 국민회의의 당수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즉, 누가 당수가 되느냐가 곧 누가 초대 총리가 되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간디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파텔 대신 네루를 당수로 세우길 원했습니다. 파텔은 간디의 뜻을 존중해 스스로 입후보를 철회하고 네루를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총독의 초청을 받은 사람은 네루였고, 정치적 감각으로 누구보다 총리 자리에 가까워 보였던 파텔은 허탈함을 삼켜야 했습니다.
독립 이후의 권력 구조
독립 후 네루는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고, 파텔은 부총리 겸 내무장관을 맡았습니다. 외무는 네루가 직접 장악한 반면, 파텔은 국내 통합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며 오늘날 '인도 통합의 건축가'로 불리는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역사학자들이 풀어온 의문
그렇다면 간디는 왜 파텔이 아니라 네루를 택했을까요? 역사학자들과 평론가들은 오랫동안 이 질문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아 왔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교육 배경의 차이입니다. 네루는 영국의 해로우 스쿨과 케임브리지, 런던에서 수학한 반면, 파텔은 인도 시골 학교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간디는 신흥 독립국가의 지도자로서 네루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저널리스트 두르가다스는 또 다른 이유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에 따르면 간디는 네루가 유럽, 중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폭넓게 여행한 경험 덕분에 국제 무대에서 훨씬 유능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종교·공동체 문제를 근거로 들기도 합니다. 무슬림에 대한 태도와 공감의 측면에서 네루가 파텔보다 간디의 사상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판단 끝에 간디는 파텔 대신 네루를 총리로 세웠고, 새로 태어난 인도의 운명은 네루의 손에 맡겨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