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지배층 사이에는 '백인은 승리하고 통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들은 승리만을 위해 어떤 도덕적 규범도 망설임 없이 저버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이 이미 항복한 뒤에도 일본은 계속 전쟁을 이어갔고,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같은 달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원폭 투하와 전쟁의 종결
두 개의 원자폭탄은 일본에서 수십만 명의 생명을 한순간에 앗아갔으며,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참극이었습니다. 무고한 국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3일 뒤인 8월 18일,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써 인도 임시정부는 일본군과 아자드 힌드 푸지(인도 국민군)라는 두 기둥을 동시에 잃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습니다.
붉은 요새 재판과 아자드 힌드 푸지의 위기
일본의 항복과 네타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아자드 힌드 푸지 병사들의 처지는 급격히 절박해졌습니다. 영국령 인도 정부군은 정글에 숨어 지내던 아자드 힌드 푸지 병사들을 대거 체포해 델리로 압송했고, 이들을 전쟁포로로 구금한 뒤 붉은 요새(레드 포트)에서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재판 결과 이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인도 전역에서 석방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인도 국민회의는 이들을 '폭력 신봉자'로 규정하며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공군·해군 파업, 혁명으로 번지다
이에 대한 반발로 군인들의 연쇄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46년 1월 20일, 카라치의 공군 병사들이 아자드 힌드 푸지 병사들에 대한 연대 시위로 파업에 돌입했고, 이 파업은 봄베이, 라호르, 델리의 공군 사령부로까지 번졌습니다. 이어 1946년 2월 19일에는 인도 해군마저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2월 21일에는 이 파업이 혁명의 성격을 띠며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봄베이를 비롯해 캘커타, 카라치, 마드라스 등 주요 도시로 파급되었습니다.
영국 장교들은 이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발포했지만, 혁명에 동조한 병사들이 총으로 응사하면서 일부 영국 장교가 사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크게 경악했습니다.
사르다르 파텔의 중재와 타협
이 위기 국면에서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이 나섰습니다. 그는 몇 차례의 어려운 협상 끝에 영국 정부와 해군 병사들 사이의 타협을 성사시켜 사태의 확산을 막았습니다. 한편 인도 국민회의는 아자드 힌드 푸지 병사들에게 인도 국민 상당수가 깊은 동정을 보내고 있음을 깨닫고, 델리에 이들을 위한 구호 캠프를 설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국 통치의 종언
이 대규모 반란 이후 영국 정부는 더 이상 인도를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냉엄한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마저 흔들리고 민심이 완전히 이반한 상황 속에서, 이 사건은 곧 인도 독립의 서막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