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52. 사르다르 파텔, 간디의 단디 야트라(Dandi Yatra)를 성공으로 이끈 마을에서 마을로의 여정

52. 사르다르 파텔, 간디의 단디 야트라(Dandi Yatra)를 성공으로 이끈 마을에서 마을로의 여정

단디 야트라를 향한 준비, 파텔의 불꽃 같은 연설

한편 간디는 단디 야트라(소금 행진)를 준비하는 동안, 사르다르 파텔은 짐가방을 메고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 다니며 불꽃 같은 연설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파텔은 민중들에게 시민 불복종 운동 기간에 벌어질 저항 활동을 하나하나 알렸습니다. 세금 납부 거부, 소작료 납부 중단, 주류 판매 금지 요구, 소금 사티아그라하, 삼림 사티아그라하, 대마와 외국산 천물 가게 보이콧, 정부 학교·대학·법원 보이콧, 그리고 정부 사업에 대한 비혼조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파텔의 연설은 사람들에게 시민 불복종 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차근차근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영국 식민당국은 사르다르가 일으킨 이러한 민중의 각성에 깊이 위협을 느껴 그의 연설을 금지했지만, 파텔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디 야트라 출발까지 이제 단 7일만 남은 시점이었습니다.

라스 마을에서의 체포, 말 한마디 없이 받아들인 형벌

1930년 3월 7일, 사르다르는 보르사드(Borsad) 인근 라스(Ras) 마을의 대규모 공개 집회에 연사로 참석하기 위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집회장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치안판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연설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르다르는 이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고, 그 자리에서 즉시 체포되어 보르사드로 호송된 뒤 3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라스 마을에서 단 한마디의 연설도 하지 못했지만, 사르다르는 이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한때 이름이 런던 전체에 울려 퍼졌던 젊은 변호사가, 이제는 런던에서 건너온 통치자들에 의해 자기 조국의 땅에서 죄수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졌고, 곳곳에서 농성과 시위, 공개 집회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7만 5천 명이 함께 맹세한 아메다바드 대집회

아메다바드에서는 대규모 공개 집회가 열렸습니다. 7만 5천 명의 군중이 하나 된 목소리로 맹세했습니다. '나라가 독립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고, 진리와 비폭력의 길을 걸으며, 부정 앞에 결코 무릎 꿇지 않겠노라.' 파텔이 연설하지 못했던 라스 마을 출신 500명도 이 자리에 함께했고, 자신들도 사티아그라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사르다르의 인기는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의 길을 따르겠다며 정부 직책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이 사직들은 국민이 그들의 지도자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습니다.

간디의 첫발걸음, 감옥 안 파텔의 기도

1930년 3월 12일, 간디지는 79명의 동행자들과 함께 사바르마티 아슈람(Sabarmati Ashram)에서 해안 마을 단디를 향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간디가 첫걸음을 떼던 바로 그 순간, 감옥에 갇힌 사르다르 파텔은 목욕재계하고 명상에 잠긴 뒤 바가바드 기타를 독송하며 신께 기도했습니다. '부디 간디의 여정이 성공하여 인도 독립의 길이 열리게 하소서.'

간디는 약 385킬로미터에 달하는 행진을 24일 만에 완주했습니다. 행진 대열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합류했고, 소금세에 대한 저항은 빠르게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 4월 6일, 소금법을 깨다

1930년 4월 5일, 간디지는 드디어 단디의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날인 4월 6일 아침, 정결 의식을 마친 간디지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듦으로써 영국의 소금법을 공개적으로 위반했습니다. 이 짧고도 상징적인 행위는 인도 독립 운동 전체를 뒤흔든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단디 야트라가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얻은 영광의 배후에는, 감옥 안에서도 하루도 흔들리지 않았던 사르다르 파텔의 고된 수행과 묵묵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간디의 이름으로 빛난 이 위대한 여정에는 파텔의 기도와 희생이 함께 녹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