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과 초기 생애
사와이 라자 자이 싱 2세(Sawai Raja Jai Singh II)는 1688년 11월 3일, 라자 비샨 싱(Raja Bishan Singh)의 라토르 왕비 인드라 쿤와리(Indra Kunwari)의 아들로 암미르(Amer) 궁전에서 태어났다. 인드라 쿤와리는 케르와(Khairwa)의 라토르 봉신 카시 싱 조다(Kashi Singh Jodha)의 딸이었다. 당시 라자 비샨 싱의 나이는 겨우 16세였으므로, 자이 싱의 어머니의 나이는 그보다 더 어렸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 소년의 원래 이름은 비자이 싱(Vijay Singh)이었고, 동생의 이름이 오히려 자이 싱이었다고 전해진다. 비자이 싱이 여덟 살이 되던 해, 그는 황제 아우랑제브에게 알현하게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비자이 싱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증조부의 이름을 따 소년의 이름을 '자이 싱'으로 바꾸어 주었다. 동시에 '사와이(Sawai)'라는 칭호도 함께 하사했는데, 이는 이 아이가 지닌 용맹함과 웅변의 재능이 미르자 라자 자이 싱(Mirza Raja Jai Singh)보다 한 배 반(1.25배) 더 뛰어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형은 '자이 싱', 동생은 '비자이 싱'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소년 자이 싱을 즉시 왕실 근무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마하라자 비샨 싱은 이 명령 앞에서 크게 곤혹스러웠다. 왕명에 거역할 수도 없거니와, 어린 아들을 위험한 전선에 내보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동안 여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1698년 열 살 난 아들 사와이 자이 싱을 남부 전선으로 보내 아우랑제브를 섬기도록 해야 했다. 다행히 몇 달 뒤, 비샨 싱은 아들의 혼사를 핑계로 아들을 다시 암미르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즉위
암미르로 돌아온 왕자 자이 싱이 도착한 지 며칠 후, 그의 아버지 마하라자 비샨 싱이 아프간 전선에서 사망했다. 당시 소년 자이 싱의 나이는 겨우 12세였다. 1700년 1월 25일, 자이 싱은 암미르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인도의 정치 상황
열두 살 소년 자이 싱이 북인도의 광대한 번왕국 중 하나로 꼽히던 암미르의 왕좌에 앉았을 무렵, 인도의 정치 상황은 매우 기묘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인도의 중앙 권력은 여전히 무굴 제국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아우랑제브의 광신적인 행보 탓에 북인도와 중부 인도의 거의 모든 힌두 통치자들이 무굴로부터 멀어진 상태였다.
조드푸르(Jodhpur)의 통치자 아짓 싱(Ajit Singh)은 왕국을 빼앗긴 채 정글을 떠돌고 있었다. 아우랑제브는 키샨가르(Kishangarh) 공주를 모욕한 일로 메와르(Mewar)의 라나 라지 싱(Rana Raj Singh)을 최악의 적으로 돌려놓았다. 비카네르(Bikaner)의 마하라자 카란 싱(Maharaja Karan Singh)은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 아우랑제브에 의해 처형당했다. 심지어 아우랑제브의 친아들인 아크바(Akbar)마저 아버지에게 반역하여 적으로 돌아섰다. 남쪽에서는 마라타족이 무굴 제국의 기반을 흔들고 있었다. 아우랑제브는 고르콘다(Golconda)와 비자푸르(Bijapur) 같은 원정 왕국을 파괴하는 데 막대한 역량을 쏟아부었는데, 단지 그곳의 통치자들이 시아파 무슬림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682년부터 아우랑제브는 친정 남인도 전선을 지휘하고 있었고, 그 공백 속에서 북인도에서는 자트족(Jats)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암미르의 혼란스러운 상황
자이 싱이 즉위하기 전까지, 카치와하(Kachhwaha) 왕조의 여덟 세대 — 브하르말(Bharmal), 바그완트 다스(Bhagwant Das), 만싱(Mansingh), 바브 싱(Bhav Singh), 자이 싱(Jai Singh), 람 싱(Ram Singh), 키샨 싱(Kishan Singh, 왕위에 오르지 못함), 비샨 싱(Bishan Singh) — 은 끊임없이 무굴에 충성을 다했으며 무굴 술탄국 체제 안에 머물러 왔다. 그러나 차트라파티 시바지(Chhatrapati Shivaji)가 아그라에서 탈출한 이후, 아우랑제브는 카치와하 가문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암미르 왕국은 라자 브하르말부터 라자 만싱에 이르던 전성기의 위상을 되찾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아우랑제브는 재위 내내 암미르의 왕 람 싱을 끔찍한 전쟁에 묶어 두었고, 그의 만사브(mansab, 관등) 역시 매우 낮게 유지했다. 카치와하 왕들은 무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용맹한 병사와 천문학적인 재산을 잃었음에도, 잘릴 샤(Jahangir), 샤 자한(Shah Jahan), 아우랑제브로 이어지는 황제들에게 더 이상 신뢰받지 못했다.
더구나 미르자 라자 자이 싱 1세와 쿠마르 키샨 싱은 미스터리한 정황 속에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암미르 왕국 내부에서도 무굴에 대한 불신의 시선이 커져 갔다. 한편 카치와하 왕들이 일곱 세대에 걸쳐 암미르 본국을 떠나 있는 동안, 암미르의 봉신들은 전횡을 부렸다. 그 결과 왕국의 군사·통치 체제는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했고, 백성의 복지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