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연재에서 프리트비라지 차우한(Prithviraj Chauhan)과 관련된 왕비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번 호에서는 그의 전쟁과 승전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한다.
16세 소년왕, 급성장한 차우한의 군사력
서기 1182년 반다나카족(Bhandanakas)을 토벌한 이후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의 세력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6세에 불과했지만, 젊은 왕은 커진 국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제국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차우한 왕조는 대규모로 군대를 모집했다. 기병과 함께 보병(파다티) 부대가 대거 충원되었으며, 프리트비라지가 즉위할 당시에만 해도 그의 군대에는 기병 7만 명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숫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늘어났다.
만도르 파디하르 왕조의 복속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통치기에 만도르(Mandore)의 파디하르(Padihar) 통치자들은 아제르(Ajmer)의 차우한 왕조에 신속하게 되었다. 독자들은 기억하겠지만, 차우한 왕조가 처음 등장할 무렵 사파달락샤(Sapadalaksha)의 차우한 통치자들은 구르자라-프라티하라(Gurjara-Pratihara) 왕조의 속국 신세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에게 패배한 만도르의 파디하르 왕은 자신의 딸 자탄 칸와르(Jatan Kanwar)를 프리트비라지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몇몇 문헌에서는 이 왕의 이름을 찬드라센 파디하르(Chandrasen Padihar)로 전하고 있다.
자무(Jammu) 원정
『타바카트-이 나시리(Tabakat-i Nasiri)』에 따르면 자무의 통치자 비자이라즈(Vijayraj)와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프리트비라지의 군대는 자무를 공격해 그 지역을 약탈했다. 이를 통해 미루어 볼 때, 프리트비라지 시대에 차우한 왕국의 영토는 델리를 지나 북쪽으로 자무까지 뻗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미르 서사시(Hammir Epic)』에서는 자무를 '가티크 데쉬(Ghatik Desh)'라고 부른다. 『푸란 프라반다(Puran Prabandha)』 모음집에 따르면 재상 카이마스(Kaimas)는 자무의 라자와 대립하지 말 것을 프리트비라지에게 간언했으나, 프리트비라지는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문헌에서는 자무 왕의 이름을 차크라데브(Chakradev)로 기록하고 있다.
타라인 전투와 자무·캉그라 왕의 최후
『프리트비라지 라소(Prithviraj Raso)』에 따르면 캉그라(Kangra)의 왕 하훌리 라이(Hahuli Rai)는 제2차 타라인 전투에서 무함마드 고리(Muhammad Ghori) 편에 서서 싸웠다고 한다. 한편 다른 문헌들은 제2차 타라인 전투에서 자무의 왕이 프리트비라지의 봉신 차문다라이 다히마(Chamundarai Dahima)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또 어떤 문헌에서는 하훌리 라이를 자무의 왕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자무 혹은 캉그라의 왕은 프리트비라지 차우한과 적대 관계였으며, 전장에서 프리트비라지 휘하 장군의 손에 최후를 맞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차우한–차울루키아 분쟁의 재점화
연이은 전쟁과 승리 끝에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국의 영역은 북서쪽으로는 무슬림 세력, 남서쪽으로는 차울루키아(Chaulukya) 왕조, 동쪽으로는 찬델라(Chandela) 왕조와 맞닿게 되었다. 참고로 찬델라 왕국은 번델칸드(Bundelkhand), 지자카북티(Jejakabhukti), 마호바(Mahoba) 왕국이라고도 불린다.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통치기에 차우한과 차울루키아 사이의 갈등이 다시 불붙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가 이 분쟁의 원인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역사적 사실 여부가 입증되지 못했다. 그러나 분쟁의 명분이 무엇이든, 실상은 차우한과 차울루키아 양측의 원수지간이 이미 수백 년째 이어져 왔고, 프리트비라지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두 나라의 국경이 아부(Abu) 인근에서 서로 맞닿게 되었다는 점이다.
피할 수 없었던 충돌
차우한의 통치자 프리트비라지 3세와 차울루키아의 통치자 빔데브 2세(Bhimdev II)는 모두 야심 찬 군주였다. 따라서 두 세력 간의 전쟁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카트라고치 파타발리(Khatragachh Pattavali)』에는 서기 1187년 프리트비라지의 구자라트 원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원정은 베라발(Veeraval) 비문을 통해 확인된다. 일부 사료는 이 전투의 연대를 서기 1184년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전쟁에서 차울루키아는 패배했다.
자그데브 프라티하르의 중재와 배상금 조약
차울루키아의 재상 자그데브 프라티하르(Jagdev Pratihar)의 노력으로 간신히 차우한과 차울루키아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조항에 따라 차울루키아 측은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에게 전쟁 배상금으로 막대한 금액을 지불했다.
"당나귀 뱃속에 꿰매 주마!"
『카트라고치 파타발리』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뒤 어느 때 아제르 왕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구자라트로 갔다. 이에 구자라트의 단다나야크(Dandanayak, 고위 군사 관리)가 그 상인들로부터 거액을 징수하려 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차울루키아의 재상 자그데브 프라티하르는 단다나야크를 크게 질책했다. 자그데브의 노력으로 맺어진 것이 바로 차울루키아와 차우한 사이의 조약이었고, 그는 이 조약이 깨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그데브는 단다나야크에게 이렇게 위협했다고 전해진다. "차우한 제국의 백성을 괴롭히기만 해 보아라. 너를 잡아 당나귀 뱃속에 꿰매 버릴 것이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당시 차울루키아 입장에서 차우한 왕조와의 평화 유지가 얼마나 절실한 과제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부의 파르마르 왕조까지 격파
베라발에서 발견된 비크람 삼밧(V.S.) 1244년 자그데브 프라티하르의 비문은, 그 이전에 프리트비라지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음을 입증해 준다. 이 원정에서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은 서기 1187년 아부(Abu)의 파르마르(Parmar) 통치자 다라바르샤(Dharavarsha)마저 격파했다.
다음 화 예고: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의 가슴 위에 독수리들이 내려앉아 살을 파먹기 시작했다!
- 모한랄 구프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