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차우한과 차울루키아의 숙명적 대립 – 서로 죽이며 국가를 무너뜨리다!

차우한과 차울루키아의 숙명적 대립 – 서로 죽이며 국가를 무너뜨리다!

차울루키아 왕조와 차우한 왕조 간의 영토 확장을 둘러싼 갈등은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왔으며, 아르노라즈(Arnoraj) 시대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달했습니다.

아르노라즈는 이러한 관계를 더욱 강화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와(Malwa) 방면으로 왕국을 확장하려 했고, 반면 구자라트의 차울루키아 통치자 싯다라자 자이싱(Siddharaj Jaisinh)은 라자스탄 방면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상충하는 야심으로 인해 양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결국 국가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서기 1134년, 첫 충돌과 혼인 동맹

서기 1134년, 싯다라자 자이싱이 아제메르(Ajmer)를 공격했으나 아르노라즈는 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습니다. 이후 체결된 조약에 따라 싯다라자 자이싱은 자신의 딸 칸차나데비(Kanchanadevi)를 아르노라즈에게 시집보냈고, 이를 계기로 양국 사이에는 잠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서기 1142년 차울루키아의 쿠마르팔(Kumarpal)이 왕위에 오르면서 차하마나–차울루키아 간의 갈등은 다시금 격화되었습니다.

저명한 저술가이자 문법학자인 자인 승려 헴찬드라(Hemchandra)는 아르노라즈가 여러 왕들을 규합하여 구자라트를 공격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공격적인 성향의 아르노라즈는 구자라트의 봉신 중 하나인 차하드(Chahad)와 손잡으면서 쿠마르팔을 몹시 곤란한 처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역사학자 하르 빌라스 샤르다(Har Bilas Sarda)에 따르면, 아르노라즈는 장인인 싯다라자 자이싱의 양자 바하드(Bahad)를 구자라트의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서기 1145년 쿠마르팔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쿠마르팔은 누이 데발라데비(Devaladevi)를 아르노라즈에게 시집보내야 했습니다.

차우파르 게임에서 시작된 불화

아르노라즈와 쿠마르팔 간의 두 번째 전쟁은 서기 1150년경에 벌어졌습니다. 자이싱 수리(Jaisingh Suri), 『진만단(Jinmandan)』, 『차리트라 순다(Charitra Sundar)』, 『프라반다 코슈(Prabandha Kosh)』 등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아르노라즈와 그의 아내 데발데비(쿠마르팔의 누이)가 인도 전통 보드게임인 차우파르(Chaupar)를 두던 중 농담처럼 서로의 가문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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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말다툼은 곧 원한으로 변질되었고, 결국 데발라데비는 오라버니 쿠마르팔에게 남편 아르노라즈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쿠마르팔은 아르노라즈를 공격했습니다.

아부 전투와 아제메르 함락

쿠마르팔이 군대를 이끌고 아제메르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접한 아르노라즈 역시 군대를 이끌고 구자라트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양군은 아부(Abu) 근교에서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쿠마르팔은 아르노라즈를 격파했습니다. 승리한 차울루키아 군대는 아제메르까지 진격했지만, 튼튼한 성벽을 넘지 못해 도시에 들어서지는 못했고, 쿠마르팔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아제메르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얼마 후 아르노라즈는 실패의 설욕을 위해 다시 한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차울루키아 군대가 아제메르에 도달했고, 아르노라즈는 또다시 패배했습니다. 결국 서기 1150년 차울루키아의 쿠마르팔이 아제메르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패배한 아르노라즈는 정복자 쿠마르팔에게 자신의 누이를 시집보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코끼리와 말까지 선물해야 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 패배로 아르노라즈의 명예는 크게 실추되었지만, 다행히 그의 왕국 영토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 승리 후 쿠마르팔은 칫토르 요새(Chittor Fort)에 아제메르 정복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기도록 했습니다.

소메슈바라와 의심 속의 전쟁

『라스말라(Ras Mala)』에 따르면, 아제메르 군대는 소메슈바라(Someshvara)가 지휘했습니다. 소메슈바라는 차울루키아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 내내 쿠마르팔의 군대는 그를 의심했지만, 아르노라즈가 쇠 창에 맞아 쓰러지면서 전쟁은 돌연 종결되었고 차울루키아는 순식간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르노라즈 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자그데브(Jagdev)와 비그라하라지 4세(Vigraharaj IV)는 마르와르(Marwar) 공주 수드화(Sudhava)의 아들이었고, 소메슈바라는 아니힐와라 파탄(Anhilwara Patan) 공주 칸차나데비의 아들이었습니다. 소메슈바라는 어린 시절을 싯다라자 자이싱의 궁정에서 보냈습니다.

명성 회복과 비극적 최후

이러한 연이은 패배는 차우한 왕조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노라즈는 가즈나(Ghaznavid) 왕조를 격파함으로써 잃었던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삼바르 호수 너머 인더스 강과 사라스바티 강 유역까지 승리의 깃발을 올렸고, 이로써 삼바르의 차우한 왕조는 북인도 최강의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차우한의 통치자 아르노라즈는 독실한 신앙심과 높은 학식을 갖추고 백성을 보호하는 현왕(賢王)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녔고, 정면 전투에서 차울루키아를 여러 차례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화살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잃었던 힘을 회복한 아르노라즈는 차울루키아에 대한 과거의 설욕전을 펼치기도 전인 서기 1155년, 장남 자가데바(Jaggadeva)가 왕위에 대한 탐욕으로 친부 아르노라즈를 살해하면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처럼 나구르(Nagaur)의 작은 사막 왕국에서 출발한 차우한 왕조는 아르노라즈의 시대에 신화 속에 잊혔던 인더스 강과 사라스바티 강 유역까지 깃발을 올리며 위대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 모한랄 굽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