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국왕

마르첼로 바차렐리(Marcello Bacciarelli)가 그린, 대관 예복을 입은 국왕의 초상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Stanisław August Poniatowski, 1732~1798)는 아우구스트 3세가 서거한 뒤 선거로 선출된 폴란드 국왕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군주였습니다. 1732년 1월 17일 볼친(Wołczyn)에서 태어났으며, 영향력은 컸지만 재산은 많지 않았던 귀족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1748년 리투아니아 관청에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세임(Sejm, 폴란드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755년에는 리투아니아 궁정 관직인 스톨니크(stolnik)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수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처음에는 영국 공사의 비서로, 그다음에는 작센 공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 황태자비, 즉 훗날의 예카테리나 대제와 밀회를 맺게 되었고, 그녀의 지원과 자신이 섬기던 차르토리스키 가문의 추대에 힘입어 1764년 11월 25일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문화 후원과 개혁 노력

즉위 직후부터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문화 육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765년에는 바르샤바에 국립극장을 설립했고, 같은 해 그의 후원 아래 잡지 『모니토르(Monitor)』가 창간되었으며, 미래의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기사학교(스코와 릭체르스카)도 바르샤바에 세워졌습니다. 그는 또한 상설 외교 제도를 정비해 폴란드 최초의 체계적인 외무 조직을 갖추었고, 1770년경부터는 학자와 문인을 모시는 유명한 '목요 만찬'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1773년에는 국민교육위원회 창설에 공동으로 참여하여, 유럽 최초의 교육 행정 기구 탄생에 기여했습니다.

정치적 위기와 폴란드 분할

예술의 후원자이자 개혁가였던 그는 폴란드 정치 체제의 근대화와 국가 무력 상태의 극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대체로 실패로 끝났습니다. 1768년 2월 24일 연방은 러시아와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해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이 나라의 국경 불가침과 내부 체제를 보장했습니다. 같은 해부터 그는 일부 귀족이 결성한 바르 연맹과의 투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772년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공동으로 단행한 첫 번째 폴란드 분할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무력에 굴복하여 타르고비차 연맹에 가담하고 말았습니다.

5월 3일 헌법과 퇴위

그가 구상한 정치 체제 개편안은 4년 의회 기간인 1791년 5월 3일 채택된 헌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 뒤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어 침공했고, 1793년에는 두 번째 폴란드 분할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는 실권을 상실했으며, 코시치우슈코 봉기가 발발한 뒤에는 봉기군에게 인질처럼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795년 11월 25일,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요구에 따라 바르샤바를 떠나 그로드노로 향해 퇴위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는 분할 삼국으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았는데, 유럽 대륙에서 가장 빚이 많은 군주 중 한 사람으로 꼽혔던 그에게 이 연금은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은 1798년 2월 1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현재 그의 유해는 바르샤바의 성 세례 요한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