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영화 감독으로,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유년기
마르그리트 제르멘 마리 도나디외(Marguerite Germaine Marie Donnadieu)는 1914년 4월 4일,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해 있던 사이곤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앙리 도나디외는 학교 교장, 어머니 마리 도나디외는 교사였으며, 그녀는 세 남매 중 셋째였습니다. 1921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마르그리트는 겨우 일곱 살이었고, 가족은 프랑스 본토 남서부의 작은 마을로 돌아가 약 2년간 생활했습니다.
1924년부터 어머니 마리는 프놈펜, 빈롱, 사덕, 사이곤을 차례로 전전하며 근무하게 됩니다. 정착을 꿈꾼 그녀는 1928년 메콩 델타에 땅을 샀지만, 끊임없이 홍수에 잠기는 그 땅은 경작이 불가능했고 결국 파산하여 다시 교단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불운한 경험은 어린 마르그리트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저작, 『프랑스 제국』
마르그리트는 1931년까지 인도차이나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사립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파리에서 법과대학에 진학하고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1938년 졸업 후 식민지성에서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 9월, 전쟁이 발발하자 동원된 로베르 앙텔름(Robert Antelme)과 결혼했습니다.
1940년, 그녀는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라는 이름으로 첫 저작인 『프랑스 제국(The French Empire)』의 공동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이 책은 율스 페리(Jules Ferry)의 "우월한 인종은 열등한 인종을 문명화할 의무가 있다"는 구절을 인용하는 등 식민주의 선전 성격을 띤 작품이었으나, 훗날 그녀는 이 책을 공개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그녀는 직장을 사임합니다.
생트누아 거리 그룹과 레지스탕스
마르그리트와 로베르는 점령하의 파리에서 전쟁 시기를 보냈습니다. 임신 중이던 마르그리트는 사산한 아이를 낳았고, 이 상실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1942년에는 출판물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이 되었고, 직접 집필을 시작해 첫 소설 『무례한 자들(Les Impudents)』을 발표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아버지 집이 있던 마을의 이름 '뒤라스(Duras)'를 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에드가 모랭(Edgar Morin), 앙리 미쇼(Henri Michaux)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마르그리트의 집에 모여 정치와 문학을 논하며 이른바 '생트누아 거리 그룹(rue Saint-Benoît group)'을 형성했습니다. 이들 여럿이 레지스탕스와 연결되어 있었고, 마르그리트와 로베르 역시 도망친 포로들에게 가짜 서류를 제공하던 네트워크 RNPG, 즉 훗날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이 이끄는 조직에 관여했습니다. 1944년 6월 로베르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마르그리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로베르는 1945년 4월 다하우에서 반쯤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마르그리트는 1년에 걸쳐 그를 돌보았습니다.
전쟁, 레지스탕스, 해방의 경험은 마르그리트에게 수많은 작품의 영감을 주었습니다. 1944년에 집필한 『전쟁 수첩(Cahiers de la Guerre)』은 훗날 그녀의 책 『고통(La Douleur)』의 내용이 되었고, 이 시기의 체험은 소설 『고통』과 영화 시나리오 『히로시마, 내 사랑』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활동가로서의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와 로베르는 1947년 4월 이혼했고, 그녀는 연인이었던 디오니스 마스콜로(Dionys Mascolo)와 재혼하여 아들 장(Jean)을 낳았습니다. 한동안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지만, 나이트클럽 출입 등 사생활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으면서 결국 당에서 제명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주장했으며, 낙태 허용 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60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를 선언한 '121인 선언'에 서명했고, 1971년에는 낙태권을 요구하는 '343인 선언'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연극과 영화
1958년, 영화감독 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이 그녀의 자전적 소설 『태평양의 방파제(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를 영화로 각색했습니다. 같은 해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과 『그토록 긴 부재(Une aussi longue absence)』의 시나리오를 집필했습니다. 또한 연극 분야로 영역을 넓혀 기존에 써둔 단편들을 각색했고, 1965년 『나무 위에서 온종일을(Des journées entières dans les arbres)』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영상화하고자 한 그녀는 1966년 『음악(La Musica)』으로, 1969년에는 『파괴하라고, 그녀가 말했다(Détruire dit-elle)』로 연출 무대에 나섰습니다. 고정된 카메라, 심지어 『대서양의 남자(L'Homme atlantique)』에서는 완전히 검은 화면까지 구사하는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다수 선보였습니다.
알코올 의존과 고뇌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 문제를 안고 금주와 음주의 시기를 반복했습니다. 1982년에는 치료 시설에 들어가 절주에 성공했지만 몇 년 뒤 다시 술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글쓰기를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들던 이 의존증에 대해 저서 『물질적인 삶(La Vie matérielle)』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1984년, 소설 『연인(L'Amant)』이 공쿠르상(Goncourt Prize)을 수상하면서 마르그리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듬해 그녀가 리베라시옹(Libération)지에 기고한 칼럼, 즉 어린 그레고리 사건에서 어머니의 유죄를 확신했다는 내용은 큰 논란과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996년 3월 3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누계 500만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일부 책은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