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얀 마테이코(Jan Matejko)가 그린 『보나 스포르차』 초상화
보나 스포르차는 누구인가
보나 스포르차(Bona Sforza, 1494~1557)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 스타리(늙은 지그문트)의 아내이자 폴란드의 왕비였다.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와 나폴리 공주 이사벨라 디 아라곤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후 아버지를 살해한 숙부의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곳곳을 떠돌았다. 여덟 살이 되어서야 어머니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받은 바리에 정착할 수 있었다.
혼인과 대관
보나는 미래의 통치자로서 엄격하게 교육받으며 자랐다.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중매로 1515년, 갓 과부가 된 폴란드 국왕에게 그녀의 혼담이 제안되었다. 보나는 1518년 초 새 조국 폴란드에 도착하였고, 같은 해 4월 18일 결혼식과 더불어 왕비 대관식을 거행했다.
강력한 왕비의 통치
보나는 야심 있고 활동적이며 극도로 검소한 성격의 통치자였다. 남편에게서 받은 영지를 능숙하게 운영해 엄청난 개인 재산을 축적했는데, 폴란드 왕령지(코로나)에서만 200개가 넘는 마을과 십여 개의 도시를 손에 넣었다. 국정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그녀가 폴란드에 머문 두 번째 10년은 '지그문트와 보나의 공동 통치기'라고 불릴 정도였다.
1530년에는 아버지가 생존한 채로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생전 대관(vivente rege)' 방식으로 외아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의 대관식을 주선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창 측량(pomiary włóczne)'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토지·경제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1537년에는 여왕의 개혁에 반발한 귀족들의 저항이 '코코슈 전쟁(닭 전쟁)'이라는 반란으로 번졌으나, 보나는 1548년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정에 대한 압도적인 영향력을 유지했다.
말년과 비극적인 최후
남편의 죽음 이후 아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와 갈등을 빚은 그녀는 마조비아로 물러났고, 마침내 1556년 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막대한 개인 동산을 싣고 폴란드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녀는 나폴리 부왕, 다시 말해 부왕이 대표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무려 43만 두카트라는 거금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불과 1년여 뒤인 1557년, 합스부르크의 밀정 얀 바브지니에츠 파파코다에게 독살당해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