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 생애와 혁명의 궤적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 생애와 혁명의 궤적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볼셰비키 당의 승리와 1922년 소비에트 연방(USSR) 수립을 이끌었다.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적 실천의 확고한 추종자였던 그는 망명 생활 중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로 정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확신한 그는 1917년 10월 혁명을 준비하고 주도했다. 정부 수반이 된 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에 막대한 영토를 양보하며 평화를 맺었고, 새로운 전체주의형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의 기틀을 다졌다.

레닌의 유년기와 청년기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는 1870년 4월 22일 심비르스크(현 울리야놉스크)에서 태어났다.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는 심비르스크 지방 교육청 시찰관이었다. 형 알렉산드르가 민중주의 조직 '나로드나야 볼랴' 일원으로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1887년 교수형당했다. 이 가정의 비극은 레닌의 혁명적 소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카잔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 운동에 가담해 몇 달 만에 퇴학당했다(1887년 12월).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변호사 자격시험을 치렀다(1891년). 당시 러시아에서 민중주의 시대가 저물고 플레하노프가 소개한 마르크스주의가 젊은 울리야노프의 사상을 사로잡았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 생애와 혁명의 궤적

18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해 칼 마르크스의 이론을 깊이 연구했으며, 평생 그 교리를 참고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논거와 인용을 찾았다. 그의 기질은 혁명의 실천과 전술 문제에 집중하게 했다. 1890년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낙관적 환상을 일찍부터 비판했으며, 혁명이 선전만으로 민중에게서 자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1895년경 러시아 수도에서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서클 중 하나인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 동맹'을 조직했으나 체포되어(1895년 12월 21일) 1년 넘게 수감된 뒤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동지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결혼(1898년 7월 22일)하고 주요 저작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혁명 지도자의 망명 생활

시베리아 형기를 마친 뒤 1900년 7월 자진 망명길에 올라 독일, 파리, 런던, 특히 스위스에 머물렀다. 뮌헨에서 기관지 이스크라(불꽃) 창간호(1900년 12월)를 발행하고,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1902년)를 통해 혁명 전술관을 밝혔다. 고립된 서클주의인 '원시주의'와 결별할 것을 촉구하고, 대다수 사회민주주의자와 달리 '직업적 혁명가'로 구성된 소수·중앙집권·규율 있는 당이 준비하고 이끌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즉각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예견과 달리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역설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 생애와 혁명의 궤적

1903년 7월 30일부터 8월 23일까지 런던에서 열린 제2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는 레닌(1901년 말부터 이 가명 사용)과 혁명 운동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반대파 다수가 퇴장한 틈을 타 레닌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고, 지지파는 '볼셰비키(다수파)'라 불리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당내 소수였다. 반대파인 '멘셰비키(소수파)'는 악셀로로프와 마르토프 주도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에 앞서 필연적으로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장차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이 수행할 역할을 강조하며 이 테제를 반박했다.

레닌의 정치적 구상

노동자-농민 동맹이라는 레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전망에 중요한 수정을 가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완숙기에 이르기 전에 혁명을 단행할 수 있었고,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배제할 수 있었다. 혁명가들은 토지 분배에 대한 농민의 열망(1905년 4~5월 런던 볼셰비키 대회)을 이용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사용했으나 모호하게 남겨두었는데, 레닌은 1905년 혁명의 실패(그는 1905년 11월 귀국했으나 큰 역할을 못 함)를 계기로 이에 구체적 내용을 부여했다.

혁명이 농촌으로 확산되고 노동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긴밀한 동맹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고립시키길 바랐으나, 농민이 여전히 차르 정권에 충성하며 소극적이어서 실패했다. 이 좌절은 레닌의 견해를 즉각 뒤집었고, 멘셰비키로부터 '공상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레닌은 멘셰비키와의 재통합에 동의해야 했다(1906년 4~5월 스톡홀름 대회). 폴란드·라트비아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 분트(Bund)의 지지로 제5차 사회민주당 대회(1907년 5~6월 런던)에서 근소한 다수를 차지했다. 이 시기 '오초비즘(합법 활동 포기론)'과 '리퀴다시옹주의(비합법·지하 활동 포기론)' 양쪽과 싸웠다. 1907년 12월 다시 망명길에 올라 1917년 혁명까지 10년간, 주로 스위스에 머물렀다.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멘셰비키와 최종 결별하고 독자 당을 꾸렸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 각국 사회주의 정당이 '성전(聖戰)'을 지지하며 자국 정부에 협조하자 깊은 실망을 느꼈다. 그는 '적에게 혁명으로 맞서라'고 호소하고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전쟁의 경제적 원인을 분석했다. 전쟁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차르 정부는 '국방'을 내세워 국내 볼셰비키 당원과 두마 의원들을 대거 체포했고, 플레하노프는 성전에 동참했다. 망명 중이던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행동의 자유를 유지하며 격렬한 패배주의 선전을 폈다. 트로츠키와 함께 치머발트(1915년 9월)와 키엔탈(1916년 4월) 평화주의 사회주의자 회의에 참석했다.

러시아 귀환과 4월 테제

1917년 2월 혁명 소식을 스위스 취리히에서 접한 레닌은 동지들을 격려하는 원격지에서 온 편지들을 보내고 귀국길을 모색했다. 스위스 사회주의자들의 중재로 독일 제국 정부가 러시아의 혁명적 붕괴를 기대하며 레닌 일행(레닌 부부, 지노비예프, 라데크 등)을 봉인 열차로 자국 영토를 통과하게 해주었다. 스웨덴과 핀란드를 거쳐 1917년 4월 16일(구력 4월 3일) 페트로그라드에 개선하듯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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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성으로 볼셰비키마저 당혹케 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임시정부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즉각 평화, 독일 병사와의 형제애, 소비에트에 권력 집중, 노동자의 공장 접수, 농민의 토지 접수를 주장했다. 1917년 7월 사태 후 총리가 된 케렌스키(프린체프 르보프 후임)가 레닌 체포령을 내려 핀란드로 도피해야 했다.

은신 중 국가와 혁명을 집필하며 당면 문제를 넘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완성했다. 계급 없는 사회와 국가 소멸이라는 궁극적 지향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혁명을 공고히 하는 과도기적 단계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부르주아 국가'를 '계급 지도자로서 무장하고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국가'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국가도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조직된 기계'이며, 그 임무는 구 지배 계급을 제거하는 것이다.

10월 혁명과 소비에트 연방 수립

1917년 10월 핀란드에서 돌아온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의 실패를 확인했다. 러시아에 군사 독재(1917년 9월 코르닐로프 쿠데타)와 소비에트 독재 외엔 선택지가 없자, 볼셰비키는 지체 없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트로츠키의 주저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회를 설득해 즉각 봉기 준비를 결정했다. 1917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봉기가 발발했다. 전투 와중에도 레닌은 놀라운 침착함으로 새 정권 건설 문제에 몰두했다. 혁명 이튿날 인민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즉각 4대 포고령을 발표했다: 즉각 평화와 토지 사회화, 공장의 노동자 관리, 러시아 제국 내 민족의 자결권 인정.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 생애와 혁명의 궤적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호를 위해 무력 사용을 결심한 그는 단 한 차례 회의 후 제헌의회를 해산시켰다(1918년 1월).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후에도 제헌의회에서 소수파에 불과했다. 반혁명 세력에 테러를 가하고 사회혁명당 운동을 진압했다.

경제 분야에선 '전시 공산주의'가 지나친 사회화로 러시아를 파탄시키고 크론슈타트 봉기(1921년 2~3월) 등 소요를 낳자, 1921년 3월 '신경제정책(NEP)'으로 선회했다. 사유재산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부분적으로 허용해 1922년부터 생산 회복을 이끌었다. 이는 후계자 스탈린이 내외정책의 원칙으로 삼은 기회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1922년 5월 25일 첫 뇌졸중으로 활동을 대폭 줄였고, 12월 16일 두 번째 발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다소 회복해 업무를 이어갔으나, 모스크바 인근 고르키의 별장에서 1924년 1월 21일 세 번째 발병으로 53세에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모스크바 붉은 광장 영묘에 안치되어 있으며, 소련 시대의 상징 중 아직 철거되지 않은 드문 사례다.

레닌주의의 유산과 평가

사망할 때까지 소련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볼셰비키 혁명의 영혼이었다. 그가 장래 공산주의 발전에 미친 책임은 논쟁적이다. 레닌이 스탈린식 독재를 비난했으리란 점은 분명하지만, 계급 투쟁을 보편적 가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인 완고함이 스탈린 독재의 토대를 닦았다는 지적도 있다. 레닌은 위대한 철학자는 아니었으나 탁월한 사상가이자 혁명 전략가였고, 냉철한 현실 감각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게 했다. 자신의 업적을 냉정히 평가해 그 성과와 위험을 모두 직시했고, 노선을 거듭 수정하며 위험을 완화하려 애썼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 생애와 혁명의 궤적

농민이 다수인 사회에서 노동자 국가를 어떻게 건설할지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의 해석자들과 비평가들의 평가는 갈린다. 어떤 이들은 초기 레닌 사상과 스탈린 사상 사이에 명확한 연속성이 있으며, 소련의 아버지 사망 후 스탈린주의가 급속히 득세했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만년에 그가 주창한 '신다원주의 정치경제학'을 강조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가 레닌을 20세기 유럽 최대의 혁명 이론가로 꼽는 데 이견이 없다. 국제·국내·경제·사회 전 방면에 걸친 그의 혁명 활동은 사회주의 혁명의 진정한 프락시스(실천)였다.

마르크스 저작에 영감받은 최초의 실제 혁명을 이론가이자 행위자로 이끈 그는 역사유물론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실용적이었고, 이론과 실천, 이념적 구축과 경험주의를 조화시켰다.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가 1924년 말했듯,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구체화로 나아갔으며, 이는 이제 완전히 실천적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해방 투쟁이 오늘날까지 배출한 마르크스와 견줄 유일한 이론가다." 확신에 찬 국제주의자였던 레닌은 제국주의 분석과 제3세계로의 혁명 확산 가능성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풍부하게 했다.

그의 사상 체계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낳아 다양하게 변용되었다. 스탈린은 개인 권력 강화에만 이용해 이론을 빈곤하게 만들었고, 마오쩌둥은 민족적·아시아적 버전을 만들었으며, 엔버 호자의 알바니아는 정통성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모델로 삼았다. 1924년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체계와 내재된 잠재적 일탈이 아무리 중요하게 평가되든, 레닌 자신은 이를 체계화하지 않았다. 소련·중국·쿠바·북한 등의 사례는 레닌의 행동을 계승하려던 자들이 상상해낸 에피고넨(epigones, 후대 모방자), 파생물에 불과하다.

참고 문헌

  • 레닌, 전체주의의 발명가, 스테판 쿠르투아 저. 페랭(Perrin), 2017.
  • 레닌: 영구 혁명, 장자크 마리 저. 탈랑디에(Tallandier), 2018.
  • 레닌 평전, 엘렌 카레르 당코스 저. 플뤼랄(Pluriel),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