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기원전 106년~기원전 48년)
고대 로마의 정치가, 집정관, 그리고 군사 지도자였던 인물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대제(Pompey the Great)'라는 별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칭호는 기원전 81년 아프리카에서 민중파(포풀라레스)의 군대를 격파한 공적에서 유래했으며, 기원전 79년에는 이러한 승전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히스파니아 원정과 노예 반란 진압
기원전 77년,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지휘권을 맡았다. 이 전쟁은 기원전 72년 세르토리우스가 자신의 부하 장교들에게 암살되면서 종말을 고했고,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는 마침내 히스파니아에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이어 기원전 71년에는 스파르타쿠스가 이끌던 노예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하였다. 같은 해,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기원전 70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술라가 남긴 여러 규정을 철폐하는 것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였다.
지중해 해적 소탕과 동방 정벌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는 지중해를 해적으로부터 정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킬리키아의 코라케시움 해전에서 해적 함대를 궤멸시키며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기원전 66년에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군의 지휘를 맡아 폰토스를 점령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격파하였다. 이후 기원전 64년에는 시리아를 정복하였고, 기원전 62년에는 로마의 동방 지배 체제 재편을 완성하며 위대한 정복자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제1차 삼두정치와 카이사르와의 갈등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비밀 협약을 체결하였고, 이 동맹은 후에 제1차 삼두정치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기원전 55년에 크라수스와 함께 다시 집정관을 역임하였고, 기원전 52년에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점차 깊어진 카이사르와의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고,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파르살루스 전투와 비참한 최후
기원전 48년 8월 9일, 폼테이우스의 군대는 테살리아의 파르살루스에서 열린 결정적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완패하였다. 도피를 계속하던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상륙하였으나, 당시 누나 클레오파트라의 군대와의 충돌을 준비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에 의해 기원전 48년 9월 28일 암살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