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호사에서 혁명 정치가로
부아시 당글라 백작 프랑수아(François de Boissy d'Anglas, 1756~1826)는 파리 고등법원(파를망 드 파리)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출신 정치가다. 1789년 삼부회에 선출되었지만 초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조용한 출발을 했다.
국민공회와 공안위원회
이후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은 온건 성향의 '평원(Plain)'에서 소극적이고 신중하게 활동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으며,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공안위원회에 합류하여 새로운 질서 수립에 기여했다.
국민공회 의장과 3년 헌법
국민공회 의장을 맡았던 그는 1795년 5월의 프레리알 봉기라는 격랑을 직접 마주해야 했다. 또한 총재정부의 법적 기반이 된 3년 헌법(1795년 헌법) 초안 작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치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오백인회와 프뤽티도르의 위기
대중적인 인기가 매우 높았던 그는 무려 72개 주의 지지를 받아 오백인회 의원으로 선출되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 과정에서 왕당파로 몰려 추방 대상이 되었으나, 간신히 추방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보나파르트 시대와 말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사면 이후 정계에 복귀한 그는 호정원(트리뷰나) 의장을 역임했고, 이후 원로원 의원으로 진출했다. 제정 선포 후에는 제국 백작에 임명되었으며, 왕정복고 이후에는 프랑스 귀족원 의원으로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