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스(Quizquiz)는 쿠스코 출신으로 잉카 제국을 섬긴 장군입니다. 그는 우아이나 카파크(Huayna Cápac) 황제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황제가 서거한 후에는 아타왈파(Atahualpa)를 지원해 남부 원정군을 지휘하며 연전연승을 거듭한 끝에 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점령했습니다. 다만 점령 과정에서 그는 귀족 상층부에 대한 가혹한 숙청을 단행했고, 왕위 다툼의 상대였던 우아스카르(Huáscar)의 친척들을 직접 체포하고 처형하는 일까지 맡았습니다.
카하마르카의 비보, 그리고 수도 방어의 좌절
아타왈파가 카하마르카(Cajamarca)에서 스페인인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퀴스는 쿠스코에 남아 있기를 택했습니다. 한편 동료 장군 칼쿠키마(Calcuchimac)는 주인을 구출하기 위해 북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칼쿠키마 역시 포로로 잡혔다는 참담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퀴스는 자신의 지휘관들에게 스페인군이 쿠스코로 진격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압도당했고, 제국의 심장을 지킬 가능성이 사라지자 쿠스코를 버리고 파루로(Paruro) 지역의 카피 산악지대로 후퇴해 잔존 병력을 재편성했습니다.
만코 잉카 연합군에 대한 결정적 패배와 후아하 전선
만코 잉카(Manco Inca)가 지휘하는 에스파뇰-쿠스코 혼성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퀴스는 후아하(Jauja) 방면으로 진격해 가브리엘 데 로하스(Gabriel de Rojas) 대위와 충돌했습니다. 로하스는 40명의 스페인 병사와 약 3천 명의 보조 인디오 병력—대부분 후아하 출신—을 이끌고 방어에 성공했고, 퀴스는 후아누코팜파(Huánuco Pampa)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방 전선: 키토 함락과 퀴스의 반격 시도
같은 시기 북쪽에서는 베날카사르(Benalcázar)가 루미냐우이(Rumiñahui)의 저항을 분쇄하고 1534년 8월 28일 산프란시스코데키토(San Francisco de Quito)를 공식 건립했습니다. 며칠 후 리마로 행군 중이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Diego de Almagro)는 퀴스가 우안카밤바(Huancabamba)에서 새 군대를 편성한 뒤 키토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습니다.
퀴스는 공격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알마그로와 알바라도의 부대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과테말라 원정에서 단련된 노련한 지휘관 알바라도의 경험이 승부를 갈랐습니다. 그는 기선을 제압해 선봉장 소크타 우르코(Socta Urco) 장군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게릴라전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비극의 종말
소크타 우르코와 우아이나 팔콘(Huayna Palcón)은 함께 정글로 들어가 향후 전략을 논의했습니다. 퀴스는 병력이 재건될 때까지 게릴라전으로 버티자는 입장이었지만, 우아이나 팔콘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고,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우아이나 팔콘이 창을 뽑아 들어 퀴스의 가슴을 꿰뚫어 버렸습니다. 잉카 제국의 걸출한 장군은 외적의 칼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 손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