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페루 국가의 가사를 쓴 호세 데 라 토레 우가르테의 생애와 업적

호세 데 라 토레 우가르테(José de la Torre Ugarte)는 1786년 3월 19일 페루 이카(Ica)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호세 에스타니슬라오 데 라 토레 우가르테는 몇 해 전 페루로 건너와 이카에 정착한 스페인 출신 인물로, 그곳에서 어머니 메르세데스 알라르콘(Mercedes Alarcón)을 만났습니다.

학업과 애국 활동의 시작

그는 산마르코스 국립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Mayor de San Marcos)에 기숙사생으로 입학했으며, 1809년부터 1812년까지 예술학(Artes) 교좌를 담당했습니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실무 수행 허가를 받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해방 원정군이 우아우라(Huaura)에 본부를 설치했을 때 그는 찬카이(Chancay) 지역 판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이 시기를 계기로 애국파 진영에 합류하게 됩니다.

애국심으로 불타오르던 그의 시적 재능은 우아우라 독립 선언이 선포되자마자 페루 국가의 가사를 집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가사에는 작곡가 베르나르도 알세도(Bernardo Alcedo)가 곡을 붙였으며, 이 노래는 1821년 국가 선정 경연에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페루의 국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같은 해인 1821년에는 전쟁부 고위 장교로 임명되었고, 산마르틴(San Martín)의 보호정 시기에는 그의 비서 대리로도 활동했습니다.

공화정 시대의 삶

리바 아구에로(Riva Agüero) 정부 시절이던 1823년, 토레 우가르테는 트루히요(Trujillo)로 건너가 상원 비서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권력 야망에 눈먼 공화파 세력 간의 알권 다툼은 그를 곤경에 빠뜨렸고, 급기야 사형 선고까지 받게 됩니다. 다행히 형 집행을 명받은 안토니오 구티에레스 데 라 푸엔테(Antonio Gutiérrez de la Fuente) 대령이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본업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트루히요에서 산마르코스 대학교에 서신을 보내 몇 년 전 미뤄두었던 변호사 자격시험 응시를 허가받고자 했습니다. 허가를 받은 그는 1825년 5월 14일 라 리베르타드(La Libertad) 주도의 고등법원에서 최종 시험에 응시했고, 마침내 변호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827년부터 1829년까지 군 감사관(전쟁 감사관)으로 근무했으며, 1830년에는 가마라(Gamarra)의 임명으로 라 리베르타드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31년 9월 1일 45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취임하지는 못했습니다.

작품과 개인사

페루 국가의 가사 외에도 그는 베르나르도 알세도와 함께 애국가 「라 치차(La chicha)」의 작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적인 삶에서 그는 1812년 마누엘라 발디비에소 이 리소(Manuela Valdivieso y Riso)와 첫 번째 결혼을 하여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으며, 1826년에는 후아나 마누리케 데 라라(Juana Manrique de Lara)와 재혼했습니다.

유해 안치와 추모

그의 유해는 파르케 우니베르시타리오(Parque Universitario)에 위치한 옛 산마르코스 저택 바로 옆, 옛 산카를로스 신학교(convictorio de San Carlos) 예배당 안에 마련된 성역인 프로체레스 묘원(Panteón de los Próceres)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페루 독립에 기여한 인물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토레 우가르테가 남긴 국가의 가사와 함께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추앙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