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90. 사르다르 파텔의 결단 – “마운트배튼 계획은 이미 늦었다”

90. 사르다르 파텔의 결단 – “마운트배튼 계획은 이미 늦었다”

정지 협정과 니잠의 미련

총독(바이스로이)의 강한 압박 속에서 1947년 11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Nizam)은 인도와 ‘정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인도와 하이데라바드 간의 우편, 전신, 철도, 도로 교통 및 무역은 원활하게 유지되었지만, 정작 니잠은 인도 연방 가입 문제를 계속 미루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영토 내 광신적인 무슬림 무장 단체 ‘라자카르(Razakars)’를 응원하기까지 했습니다.

라자카르의 횡포와 공동체 폭력

니잠은 라자카르들에게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면 영국인 친구들이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며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니잠의 지원에 힘입어 무슬림 공동체주의 단체 ‘이티하드울무술리민(Ittehad-ul-Muslimeen)’과 그 준군사조직인 라자카르는 왕번주 하이데라바드의 다수파인 힌두교도들을 위협하고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영토에서 쫓아내려 했습니다. 라자카르들의 폭력 행위는 왕번주 내부의 평화와 질서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왕번주를 관통하는 철도와 도로는 훼손되었고, 기차와 버스로 이동하던 힌두교도들은 약탈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델리의 붉은 요새에 깃발을 게양하겠다”는 위협

무슬림 라자카르의 지도자 카심 리즈비(Qasim Rizvi)는 인도 정부에 “언젠가 인도 전역을 정복해 델리의 레드 포트(붉은 요새)에 니잠의 아사프자히 깃발을 게양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위협했습니다. 이후 하이데라바드 주에서 힌두교도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약탈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마운트배튼 계획은 이미 늦었다”

마운트배튼 경, 사르다르 파텔, V.P. 메논은 니잠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이제 상황은 니잠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라자카르들과 광신적인 물라·물라비들은 무슬림 대중을 부추기며 공동체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사르다르 파텔과 V.P. 메논은 마운트배튼이 영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1948년 6월 마운트배튼이 본국으로 돌아간 지 두 달 뒤인 9월, 니잠은 마운트배튼 계획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해 1948년 9월 13일, 파텔은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 마운트배튼 계획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네루 총리는 유럽 순방 중이었고, 사르다르 파텔이 총리 대행을 맡고 있었습니다.

폴로 작전: 단 5일 만의 통합

그리하여 파텔은 같은 날 군대에 하이데라바드를 인도에 통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작전은 ‘폴로 작전(Operation Polo)’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조인토나스 초우드리(Joyanto Nath Choudhuri) 소장의 지휘 아래 인도군이 하이데라바드에 진입했습니다. 5일간의 작전 끝에 인도군은 무슬림 라자카르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했고, 수천 명의 라자카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이데라바드 곳곳에 라자카르들의 시신이 널려 있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1948년 9월 17일, 하이데라바드군 총사령관 E.I. 에드루스(E.I. Edrus) 장군은 세쿤더라바드에서 초우드리 장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하이데라바드는 불과 5일간의 경찰 행동으로 인도에 합병되었습니다.

우려되었던 폭탄 테러도, 대규모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9월 18일, 초우드리 소장은 하이데라바드 왕번주의 군정 총독으로 취임했습니다. 하이데라바드 왕번주는 인도 연방에 편입되었고, 니잠은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잠에 대한 예우와 이후의 운명

사르다르 파텔은 니잠을 예의 바르게 대우했습니다. 그는 명예상 왕번주의 원수로 남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훗날 주(州) 재편이 이루어질 때 하이데라바드 왕번주는 해체되었고, 그 영토는 안드라프라데시, 카르나타카, 마하라슈트라 세 주에 나누어 편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