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리처드 3세(Richard III)는 1452년 10월 2일 잉글랜드 노샘프턴셔의 포더링헤이 성(Fotheringhay Castl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과 세실리 네빌 사이에서 태어난 여러 자녀 중 막내였으며, 훗날 왕이 되는 에드워드 4세와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비롯한 여러 형이 있었습니다.
1460년 아버지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할 당시 리처드는 여덟 살의 어린아이였습니다. 이듬해인 1461년 장형인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하면서 요크 왕조가 열렸고,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Duke of Gloucester)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소년 시절의 리처드는 일정 기간 '왕좌의 제작자'라 불린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보호 아래에서 기사도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후 그는 북부 잉글랜드를 다스리며 성실하고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았습니다.
1472년에는 워릭 백작의 딸이자 전 랭커스터 왕자의 미망인이었던 앤 네빌과 결혼하여 외아들 에드워드(미들럼 백작)를 두었지만, 아들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현대 의학적 분석에 따르면 리처드는 척추측만증(scoliosis)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당대 기록은 그의 신체적 특징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으며, 굽은 등의 흉흉한 이미지는 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초상화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작은 체구에 창백한 피부를 지닌 인물입니다.
즉위와 짧고 격동적인 재위
형 조지는 1478년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1483년 4월에는 에드워드 4세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리처드는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에드워드 4세의 자녀들이 적법하지 않다는 선언을 근거로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1483년 7월 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런던탑에 감금되었던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 이른바 '탑 속의 왕자들'은 행방불명되었고, 이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이러한 정변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재위 내내 1483년 버킹엄 공작의 반란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보즈워스 전투와 최후
1485년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권자 헨리 튜더(리치몬드 백작)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에 상륙했습니다. 같은 해 8월 22일 레스터셔의 보즈워스 필드(Bosworth Field)에서 벌어진 결정적 전투에서 리처드는 패배하고 전사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습니다.
리처드의 죽음과 함께 길게 이어진 장미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요크 왕조는 끝났고, 헨리 7세가 개창하는 튜더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후: 유해의 발견과 재안장
리처드의 시신은 레스터의 그레이프라이어스 수도원 교회에 급히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다 2012년, 레스터 시내 한 주차장 아래에서 그의 유해가 발견되어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DNA 검사를 통해 후손과의 혈연 관계로 신원이 확인되었으며, 유골에서는 척추측만증의 흔적과 함께 전투에서 입은 수많은 상처가 발견되었습니다.
2015년 3월, 리처드 3세의 유해는 레스터 대성당(Leicester Cathedral)에 재안장되며 500여 년 만에 명예로운 장례식을 거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