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데릭(Frédéric)'은 독일어 '프리드리히(Friedrich)'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평화'와 '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 등 북유럽의 수많은 군주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이 사용했으며, 12세기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프레데리코(Frederico)', '프레더릭(Frederick)' 등 다양한 언어 형태로 존재하며, 프랑스식 변형은 라틴어 '프레데리쿠스(Fredericus)'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프레데릭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클래식한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성 프레데릭
7월 18일이 축일인 성 프레데릭은 9세기 위트레흐트의 주교였습니다. 본인의 부담스러워함에도 불구하고, 카롤링거 제국 황제 경건왕 루트비히에 의해 820년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프리슬란트 지역의 전교 사업에 헌신했고, 아리우스주의를 비롯한 지역 이단 사상과 맞서 싸우는 한편,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가장 소외된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838년, 자신이 부도덕하다고 질책했던 황후 유디트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왕과 황제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22~1190), 신성 로마 제국 황제(재위 1155~1190).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수장으로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제국 권위 재건에 착수했으며, 교황의 권력을 정신적 영역으로 한정하려 시도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지원을 받은 롬바르디아 동맹에게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패배한 뒤, 베네치아 평화 조약(1177)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도중 킬리키아(오늘날 튀르키예)의 살레프 강에서 익사했습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1194~1250, 포자 인근 피오렌티노 출생), 시칠리아 왕(프레데리코 1세 로제르, 1197~1250)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1220~1250).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의 콘스탄체의 아들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보호를 받았으며 1215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는 제국의 지중해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롬바르디아 동맹과 싸웠으며, 이집트 술탄으로부터 기독교 순례자들의 성지 자유 접근권을 얻어냈습니다. 또한 수도 팔레르모를 지식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 프로이센 국왕(1740~1786). 그는 국가 행정 체계를 강화하고 군대를 현대화했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1740~1745) 끝에 실레지아를 정복했고, 7년 전쟁 중에도 그 지역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폴란드 제1차 분할 당시에는 서프로이센을 획득했습니다(1772). 학식 있는 문인(『반 마키아벨리』, 1739)이자 음악가, 문예 후원가였던 그는 볼테르와 프랑스 학자들을 산수시 궁전의 궁정으로 초청했습니다. '철인 왕'이라 불린 그는 계몽전제군주의 전형이었습니다.
그 외 유명한 프레데릭들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 폴란드 출신 작곡가로, 슬라브 선율의 토대 위에 세워진 녹턴, 에튀드, 전주곡, 폴로네즈를 통해 피아노 작법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슈만과 리스트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낭만주의 시대 파리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고, 조르주 상드와 오랜 연애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중세 말기에 쇠퇴했던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은 19세기(프레데릭 미스트랄,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 프리드리히 니체)에, 그리고 특히 20세기 중반(프레데릭 로시프, 페데리코 펠리니,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등)에 걸쳐 다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읽어볼 자료
- 오메르 엥글베르(Omer Englebert), 『2000개의 이름과 그 역사(2000 prénoms et leur histoire)』, 알뱅 미셸(Albin Michel),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