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문화에서 프뢰슈빌러-워르트(Frœschwiller-Woerth) 전투는 '라이히스호펜 전투'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칭은 1870년 8월 6일, 압도적인 적군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자신을 던진 유명한 '라이히스호펜' 흉갑기병 연대에서 유래했습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벌어진 이 전투에서 마크 마옹(Mac Mahon)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수적으로나 화력에서 모두 우세한 적을 상대로 한 무모한 돌격 끝에 패배했고, 프로이센 군대는 알자스와 로렌을 점령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라이히스호펜 전투의 배경
소위 '라이히스호펜(Reichshoffen)' 전투는 1870년 8월 6일, 주로 워르트(Woerth, 독일군이 붙인 명칭), 프뢰슈빌러(Frœschwiller, 프랑스가 지정한 명칭), 그리고 모르스브론(Morsbronn) 일대에서 벌어졌습니다. '라이히스호펜'이라는 이름은 마크 마옹 원수의 참모부가 이곳에 주둔했고, 전투에서 희생한 여러 흉갑기병 부대가 이 마을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8월 4일 비스춤부르(Wissembourg)에서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워르트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10만 명에 달했으며, 마크 마옹 휘하의 4만 3천 명 프랑스 병력과 맞섰습니다.
전투는 오전 7시 포격과 정찰 교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 소규모의 산발적인 충돌들이 대부분의 병력을 전투에 끌어들이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4대 1이라는 절망적인 열세 속에서도 용감하게 싸웠으며, 미셸(Michel) 여단 소속의 유명한 '라이히스호펜 흉갑기병'은 이를 포위 섬멸하려는 프로이센군을 향해 대규모 돌격을 감행하며 영웅적으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특히 모르스브론에서는 흉갑기병들이 마을을 향해 돌진해 좁은 골목길로 몰려들었고, 집안에 매복한 적들에게 거의 근접 거리에서 몸을 내던졌습니다.
영웅적이지만 무의미했던 돌격
독일군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장교 487명과 병사 10,153명이 사망했으며, 프랑스 측 사상자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총 약 10,000명이 전사하고 6,000~9,000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전투의 결과는 프랑스군에게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이 패배로 프랑스군은 알자스를 사실상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의 희생 덕분에 군대는 질서 있게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8월 6일 하루가 너무나 처참했던 나머지, 인근 마을의 민간인들은 전장에 널린 시신들을 매장하라는 징발 명령까지 받았고, 모든 시신을 묻는 데만 거의 8일이 걸렸습니다.
또한 앞서 살펴본 것처럼 '라이히스호펜 전투' 또는 '라이히스호펜 돌격'이라는 이름은 실제 전투가 이 마을에서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남았습니다. 실제 전장은 라이히스호펜에서 약 9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참고문헌
- MILZA, Pierre, 『The Terrible Year: 1870년 9월 – 1871년 3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페랭(Perrin), 파리, 2009.
- 『전쟁 지도집: 1870–71, 전투 및 포위전 지도』, 아메데 르 포르(Amédée Le Faure) 저, 아셰트(Hachette),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