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에브로 강변의 템플 기사단 요새, 미라베트 성의 역사와 비밀

에브로 강변의 템플 기사단 요새, 미라베트 성의 역사와 비밀

에브로 강 우안, 지중해로 거대한 강물을 내보내기 불과 몇 킬로미터 전 지점에 미라베트 템플 성의 웅장한 실루엣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슬람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역사의 오랜 기간 활발히 사용되었음에도 '템플'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거대한 성벽이 템플 기사단이 그들의 위대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라곤 왕국과 템플 기사단

아라곤 왕국, 훗날의 아라곤 왕관령(Crown of Aragon)과 성전 기사단의 역사는 불가분하게 얽혀 있습니다. 특히 1134년 알폰소 1세 '전사왕(el Batallador)'이 서거하면서, 그는 아라곤 영토의 상속자 중 하나로 템플 기사단을 지명했습니다. 최고 귀족들의 간섭으로 결국 영토를 상속받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기사단이 아라곤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독특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템플 기사단은 아라곤 왕국의 확장을 위한 무슬림 영토 정복과 통치 임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습니다.

템플 기사단과 라몬 베렝게르 4세

알폰소 1세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선택된 것은 그의 동생 라미로 2세였습니다. 고위 귀족들에 의해 옹립된 그는 어린 왕국을 통치하기보다는 수도 생활에 헌신하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한 살배기 딸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혼인시킨 뒤, 왕관을 새 사위의 손에 맡기기로 결심합니다.

새 군주의 첫 번째 결정은 템플 기사단을 비롯한 종교 군사 기사단들과 알폰소 1세의 논란이 된 상속 문제를 합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라곤 왕국의 영토는 아라곤 군주제의 세습 재산으로 남기로 하는 대신, 템플 기사단은 특권과 새로 정복한 땅에 대한 광대한 영지를 보장받았습니다. 이 협약 이후 군주제, 고위 귀족, 템플 기사단 간의 협력 체계가 완성되었고, 이베리아 반도 동부 무슬림 영토 정복의 막이 올랐습니다.

정복인가, 재정복인가? 관점에 따라 답은 달라집니다. 기독교도에게는 재정복(레콩키스타)이었고, 반대편 무슬림에게는 정복이었겠지요. 어느 쪽이든 사실은 분명합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기독교 왕국은 에브로 강 이북의 모든 영토를 손에 넣었습니다. 1148년의 토르토사, 1149년의 프라가와 레다가 그 예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무슬림 거점은 해발 700미터가 넘는 바위 위에 자리한 작은 요새 시우라나와, 오늘의 주인공 미라베트였습니다. 두 성 모두 1153년까지 기독교군의 포위 공격을 버텨냈습니다.

미라베트 성의 전략적 중요성

정복 직후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이 영토를 템플 기사단에 하사했고, 기사단은 무슬림 요새 위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손꼽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토회 수도원 성을 빠르게 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임무는 아라곤 왕국에서 강들이 자연적으로 형성하던 방어선을 보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국왕들은 미라베트 외에도 에브로 강변의 토르토사, 신카 강변의 몬손, 세그레 강변의 가르데니를 템플 기사단에 넘겼습니다. 이 네 거점은 하나의 방어선을 이루는 동시에, 발렌시아 방면 정복의 선봉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에브로 강변의 템플 기사단 요새, 미라베트 성의 역사와 비밀

라몬 베렝게르 4세와 그의 아내 페트로닐라

미라베트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는 몬손 성에서 템플 기사단으로 성장한 왕, 아라곤의 하메스 1세(1213~1276) 시대에 찾아옵니다. 에브로 강 이남과 지중해 방면으로 대정복이 이루어진 이 시기, 아라곤 왕관의 기록 보관소와 보물고의 지역 본부가 바로 미라베트 템플 성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미라베트 성의 비극적 포위전

성전 기사단의 마지막 대단장 자크 드 몰레가 1307년 파리에서 투옥된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메스 2세가 다스리던 아라곤 왕국은 처음에는 템플 기사단에 대한 끔찍한 고발들을 의심했지만, 이후 결국 조치에 나서기로 합니다.

1307년 말부터 기사단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미라베트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저항이 격렬하여 포위전은 거의 1년간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1308년 12월 6일, 미라베트의 템플 기사단들은 아라곤 왕 하메스 2세 앞에 항복했습니다. 다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단장 베렝게르 데 산트 후스트를 포함한 여섯 명은 성의 주탑에서 기사단의 기록과 보물을 끝까지 지키다가, 다음 날 바로 그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오늘날의 미라베트 성

방문객을 맞이하는 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 미라베트 성이 장기간의 포위전과 전투를 견디도록 설계된 요새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산의 암반에서 솟아나 듯한 높이 25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벽 뒤에는, 미라베트를 템플 기사단만의 피난처로 만들기 위해 지어진 다양한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 내부 관람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층부

성의 주 출입구는 배비칸(barbican), 즉 성문에 대한 직접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경사지게 건설된 견고한 진입로를 통과합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산의 고저차를 보완하기 위해 세 단으로 나뉜 거대한 테라스가 펼쳐지며, 이 테라스는 성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곳에는 창고, 축사, 그리고 템플 기사단이 곡물 저장고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굿간 등 여러 건물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시설들은 과수원과 올리브 농장과 더불어 성이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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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이어지는 진입 경사로

훗날 추가로 건설된 작은 문을 통해 오늘날 성 내부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공간은 열병장으로, 병력 집결지라는 본래 기능 외에도 성의 여러 방들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열병장 주변의 첫 번째 방들은 미라베트 거주민들의 생활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암반을 직접 파낸 저수조(시스터너)와 바로 맞은편의 대형 주방이 그것입니다. 이 주방은 다른 기사단과 달리 기사들의 식사에 각별한 신경을 썼던 템플 기사단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에 딸린 방은 첨두형 통천장을 지닌 넓은 식당입니다. 이 외에도 목장주, 농부, 심지어 지역 어부들로부터 현물 세납을 받기 위한 헛간, 지하 저장고, 창고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에브로 강변의 템플 기사단 요새, 미라베트 성의 역사와 비밀

미라베트 성의 주방

에브로 강변의 템플 기사단 요새, 미라베트 성의 역사와 비밀

미라베트 성의 식당

상층부

상층부에는 단장을 비롯한 미라베트 성의 저명한 거주자들의 방과 함께 성내 교회가 있습니다. 템플 기사단은 극도로 소박하게 꾸며진 이 공간에서 매일의 기도 의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통형 볼트 천장으로 덮인 바실리카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작은 성구실이 있는 후진에서 좁은 통로가 시작되어 보물탑과 교회를 연결했습니다. 미라베트의 마지막 템플 기사단들이 최후를 맞은 곳은 아마도 바로 이 보물탑이었을 것입니다.

에브로 강변의 템플 기사단 요새, 미라베트 성의 역사와 비밀

성의 상층부 교회

그 한 층 위에는 단순하지만 넓은 전망대가 있습니다. 좁은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며,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입니다.

성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입장료와 운영 시간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방문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템플 기사단 이후의 미라베트

성전 기사단이 해체된 후에는 호스피탈 기사단이 19세기의 교회 재산 몰수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미라베트 성을 관리했습니다. 이후 성은 여러 개인 소유주의 손을 거치는 긴 여정을 겪었고, 1990년에야 카탈루냐 자치정부(Generalitat de Catalunya)의 소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성은 새로운 화포 전쟁 시대에 대응한 대대적인 개축 없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대신 17세기 수확자 전쟁,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9세기 카를리스타 전쟁, 그리고 마침내 20세기 스페인 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