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결혼하면 이름마저 버려야 했다: 중세 유럽 왕녀들의 강제 개명 이야기

왕의 딸이라 할지라도, 남편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 흔적을 모두 지울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중세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일이며,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공주들은 특히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모범은 비잔틴 제국에서 시작되었다

이 기준을 만든 곳은 최정점, 즉 비잔틴 제국이었습니다. 영토는 줄고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로마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지키던 비잔틴은 무엇보다 '우월함'이라는 감각을 사수하려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엘리트들은 대륙의 어떤 고귀한 가문도 자신들의 격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외국 왕조 출신 여성이 황제와 결혼하려면, 이름을 비롯해 과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1186년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딸 마르그레테는 황제 이삭 2세 아겔로스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헝가리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녀 역시 화려한 혼맥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조상 가운데는 독일 황제, 키예프 루스의 군주, 심지어 과거 콘스탄티노플을 다스렸던 왕조의 인물들까지 있었습니다.

결혼하면 이름마저 버려야 했다: 중세 유럽 왕녀들의 강제 개명 이야기

그러나 비잔틴인들은 이런 자랑스러운 가계에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마르그레테는 마자르인으로서의 과거를 숨기고 현지 이름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후보의 폭은 매우 좁았습니다. 사실상 과거 저명한 황후들이 쓰던 이름만 선택지였고, 결국 그녀는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슬라브 출신 '테오파노'?

독일의 중세학자 게르트루트 토마는 12세기 말까지 제국 가문에 시집들어간 여성 중 적어도 12명이 자신의 이름을 잃었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이는 분명히 과소평가된 수치입니다. 그 이후 등장하는 수십 명의 인물들에게서도 같은 동화 과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물은 계보표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리니, 안나, 헬레네, 마리아, 테오파노 같은 이름이 비잔틴 옥좌에 반복해서 앉아 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슬라브 출신 여성들조차 이런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결혼하면 이름마저 버려야 했다: 중세 유럽 왕녀들의 강제 개명 이야기

볼레스와프 흐로브리(용감공)의 딸인데도 독일에서 '레겔린다'로만 알려진 그녀 역시 원래 이름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관행은 종교 차이나 외국어 발음의 어려움과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비잔틴 내부에서도 서열이 낮은 가문 출신 여성들에게 이름 변경이 명령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도 콘스탄티노플의 영향 아래에서, 혹은 독자적으로 이 관습은 서방으로도 퍼져나갔습니다.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3세는 아내의 이름을 군힐다에서 쿠네군다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도 뒤를 이었습니다. 그는 키예프 출신의 오브프라크시야와 약혼했지만, 결혼과 대관식 이후 그녀는 익숙한 이름인 '아델라이데'로 불렸습니다. 서방 황제들 역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배하던 동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 자체가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지방성'의 대가

이름을 바꾸는 전통이 제국, 혹은 제국의 꿈을 키우는 곳이라면 어디든 번져나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피아스트 왕조 사람들은 이를 몸소 겪었습니다. 므슈코 2세의 딸 게르트루다는 루스에서 '올리사바'로 불렸습니다. 또한 므슈코 1세의 딸로, 문헌에서 스비엔토스와바-시그리다로 알려진 유명한 '바이킹의 왕비' 역시 덴마크에서 게르만식 이름인 '군힐다'를 쓰도록 강요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피아스트 공주를 맞아들인 쪽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귀족들조차 비슷한 개명을 감행했습니다. 마치 동방의 '야만인'과의 혼인이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처럼요. 돌니루지츠 변경백 디트리히는 볼레스와프 크시보우스티(구부정공)의 딸을 맞아들이면서, 할머니 마리아 도브로니에가를 따라 지어진 세례명 '도브로니에가'를 버리고 '루드가르다'로 부르게 했습니다. 한 세기 전에는 마이센 변경백 헤르만이 같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역사는 그가 맞아들인 볼레스와프 흐로브리의 딸의 슬라브식 이름을 아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녀를 독일식 이름 '레겔린다'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의식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작동했다는 사실입니다. 피아스트 왕조는 비스와강으로 시집온 공주나 왕비의 이름을 끝내 바꾸지 않았습니다. 아내들에 대한 존중이 컸거나, 독일·루스 여성과의 혼인을 자랑스러운 혼맥으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포즈난의 중세학자 그제고시 파크가 비관적으로 진단했듯,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방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출처 및 참고 자료

이 글은 저자가 『강철의 여인들: 폴란드를 세운 여성들』(Kraków, 2015) 집필 과정에서 수집한 문헌과 자료를 바탕으로 하며, 그제고시 파크(Grzegorz Pac)의 연구 「피아스트 왕조의 여성들 — 12세기 중반까지 피아스트 왕가의 아내와 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비교 연구」(Toruń, 2013)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