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족의 해방자로 추앙받는 김일성은 일곱 살 때부터 제국주의의 착취에 맞섰다고 한다. 십 대에는 수많은 대중조직을 이끌었다고도 하고.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터무니없는) 선전일까? 그의 유년기에 대해 '알려져 있는'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오늘날 북한의 수도인 평양 근교의 작은 마을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선전에 따르면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국가 해방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활발히 활동하던 비밀결사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정작 그런 조직에 관한 기록은 북한 측 자료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김일성은 어머니의 젖과 함께 혁명 기질을 빨아들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강반석은 최하층 사회 계급 출신이라는 것이 공식 역사학의 설명이다. 그러나 1960년대 자료를 들춰보면 그녀의 아버지가 학교 교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 학교는 장로교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현재 북한에서 강반석은 여성·아내·어머니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남편(특히 지하 활동)을 보좌하고 자신이 이끄는 대중조직인 반일여성동맹을 운영한 것이 그녀의 강점으로 내세워진다. 이 조직은 한국 여성들을 각성시켜 혁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조직 역시 대한민국의 기록 보관소나 일본 정보 당국의 문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김일성, 최연소 혁명가
이처럼 '훌륭한 혁명 혈통' 덕분에 김일성은 사실상 한국 민족의 위대한 해방자가 될 운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월의 사건(3·1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투쟁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위대한 수령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일곱 살 소년이었던 나는 시위대 행렬에 동참해 낡은 짚신을 신고 인파 속을 걸었다 […]. 어른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 집단적이고 힘찬 함성 속에는 나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후 몇 년간 김씨 가족은 경제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한반도 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일성의 아버지는 해방 운동(북한 선전에 따르면 훗날의 김일성에 필적할 만큼 대규모로 수행된 활동) 때문에 감시 대상 조선인 명단에 올라 '1급 감시 대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유년기를 혁명적으로 재단한 것은 선전 작업의 핵심 요소였다.
진정한 혁명가답게 그는 가족과 함께 해외로 떠났다. 아니면 '개량된' 버전의 이야기에 따르면 도피한 것이 아니라 국가 해방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떠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선전용)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조국을 떠나며 느꼈다는 감정을 이렇게 적었다:
사람은 평생 동안 다양한 슬픔을 겪는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슬픔은 조국을 잃는 것이다. 특히 나라 없는 피난민으로 살아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어린 아이가 북한 역사학이 주장하듯 어린 김일성이 애태워 했다는 '국가의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글쎄, 적어도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만주에서의 생활은 미래의 지도자에게 꽤 유쾌한 시간이었다. 김형직은 의술을 개업했고, 어린 김일성은 다른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1923년이었다. 김일성의 아버지는 아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그곳에서 계속 공부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며, 열한 살짜리 아이를 홀로 1,000리, 즉 약 400km에 달하는 긴 여정에 내보냈다!
여기에 어느 정도의 진실과 어느 정도의 허구가 섞여 있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고향 만경대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고, 주변 마을들의 가난한 실태를 본 소년은 가정 형편상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북한 선전의 가장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인 설정 중 하나다.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열두 살 아이가 혼자서 학교를 운영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고향에서의 평온한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6년 김일성은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소년은 힘든 시기를 겪는 가족을 돕기 위해 만주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만주와 조선의 경계였던 압록강을 건너며 그는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란 곳이며 조상의 유해가 잠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고 되묻고는, "마음이 슬픔을 담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공식 버전에 따르면 김일성은 같은 길을 두 번째로 건너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은 짧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이 만주에 도착한 직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의 후학에 관해 매우 구체적인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놀랍게도 어린 소년은 (유고에 따라) 흔히 상상할 법한 공산주의 계열이 아니라 민족주의 뿌리를 가진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김일성이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좌우되지 않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직접 읽고 조선 민족에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공산주의에 도달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된 선전 장치일 것이다. 물론 당시 이 저작들은 아직 한국어나 중국어로 번역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그저 사소한 누락으로 치부된다.
제국주의 투쟁의 새로운 방법
학교에서 김일성은 최연소 학생임에도 성공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친구들에게 복잡한 문제를 쉽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이 무렵 그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대중조직인 '타제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과 첫 번째 아내, 그리고 아들 김정일.
열네 살 소년이 이런 조직을 결성하고 어떤 이념이든 보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꽤 말이 안 되어 보이지만, 선전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위대한 통수권자의 전기에 따르면 이러한 활동이 소년에게 큰 재미를 주었고, 그래서 새로운 동맹과 협회를 더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단 2년 사이에 그의 주도로 새날 선구자동맹, 조선공산청년동맹, 길림 조선선구자협회, 길림 조선유학생협회 등이 잇달아 결성되었다. 이 조직들의 활동에 관한 보고서라면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텐데, 정작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참으로 흥미로운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열여섯 살이 되자 김일성은 비밀스럽고 '탁월한' 혁명 조직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파업을 새로운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파업은 반동 교사들을 상대로 벌어졌는데, 이 시도는 큰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선전 잡지에 언급된 내용 외에는 이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
젊은 지도자의 밝은 미래
1928년 가을, 연이은 성공에 고무된 김일성은 승세를 몰아 훨씬 더 큰 규모의, 훨씬 더 중요한 현안에 관한 파업을 조직하기로 한다. 일본이 만주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건설해 끔찍한 제국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북한 선전이 그리는 미래의 수령의 삶에서 늘 그렇듯, 이 시도 역시 성공으로 끝났다고 한다.
파업은 김일성에게 추가적인 기회를 열어 주었다. 그중 하나는 당대의 다른 조선 지도자들과 알게 되면서 그들의 '본색'을 폭로한 것이었다:
당시 공산 및 민족 운동의 '지도자'를 자칭했던 그들 대부분은 예외 없이 종파 분자거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맹목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그룹의 소수만을 규합해 '패권'을 두고 종파적 다툼을 벌이거나, 우리 나라의 구체적 현실과는 무관한 좌경적·우경적 공론에만 몰두했다.
북한 역사학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러한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감옥에 수감된 것은 한 번으로 알려져 있는데, 죄질이 경미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이는 공식 전기에 서술된 위대한 수령의 '위업'들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한편 석방 후 김일성은 혁명 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게 되는데 —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