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인민공화국(PRL)은 딱 한 가지 문제만 없었다면 잘 살았을 것이다. 바로 '고기'다. 고기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했고, 가격 인상과 공급난은 대규모 사회적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1980년 7월 8일, 비드니크(Świdnik) WSK-PZL 항공기 제조소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직원 식당의 가격 인상에 분노했다. 커틀렛 가격이 10.20즐로티에서 18.10즐로티로 뛰어오른 것이다. 구내식당에서 누군가 "파업!"이라고 외쳤고, 다른 이들이 호응하며 '루블린 7월 80'이 시작되었다. WSK를 비롯해 지역 내 150여 개 기업이 파업에 동참했다. 7월이 지나자 해안 지역과 전국으로 '8월 80'이 번져나갔다. 그 원인도 같았다. 특히 고기를 비롯한 물품 부족이었다.

에드바르트 기레크, 1980년
폴란드 인민공화국 노동자 시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직접적인 원인은 언제나 가격 인상과 물품 부족, 그리고 대개는 둘 다였다. 1976년에는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가 기본 식료품 가격을 대폭 인상하겠다고 발표하자 파업으로 맞선 것이다. 고기는 무려 69%나 오르기로 했다. 보상책이 마련되긴 했지만, 소득이 높은 사람이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구조였다. 돌이켜보면 가격 조정과 개편이 불가피했음을 알 수 있지만, 정부는 노동자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시위의 또 다른 배경에는 기레크 시대 삶의 질 향상에 대한 기대가 배신당했다는 실망감이 있었다. 1970년 유혈 진압 시위의 발단 역시 고기를 포함한 물가 인상(18%)이었으며, 인상은 어디까지나 도화선일 뿐 근본 원인은 열악한 생활 조건이었다.
죄인은 '투기꾼'?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역사는 끊임없는 물품 부족과 상점 앞 줄서기의 역사였다. 경제는 비효율적이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변국인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동독의 상점들은 물건이 넘쳐났다. 식품 공급 부족은 비효율적이고 분산된 농업, 외화 확보를 위한 무분별한 수출, 그리고 가격을 실태에 맞게 올리지 못하게 만든 정부의 두려움이 낳은 결과였다. 가격 통제는 오히려 위기를 부추겼다.

고기 엽서
물론 당국은 죄인을 찾으려 애썼다. 주로 소위 '투기꾼'들이 그 대상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1965년에 벌어졌다. 시립 육류 판매소(Miejski Handel Mięsem)의 간부 중 한 명이었던 스타니스와프 바브젠츠키(Stanisław Wawrzecki)가 '법정 살인'을 당한 사건이다. 바브젠츠키는 점포 관리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 대가로 물품을 공급해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은 실제로 집행되었다. 재판 과정은 전형적인 선전 성격을 띠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는 시장 부족의 책임이 도둑과 뇌물수수자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여론에 각인시키고 싶어 했다.
대구요? 고양이 밥이나 될 것 같은데
고기와 고기 제품에 대한 수요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들도 시도되었다. 1959년에는 외식업과 유통업에서 '고기 없는 월요일'이 도입되었다. 물론 건강에 대한 배려라는 명분이 붙었고, 어느 정도는 타당한 설명이었다. 언론은 과일, 채소, 단백질 함유 식품을 기반으로 한 건강 요리를 홍보했다. 그러나 폴란드 사람들은 여전히 돈까스, 족발, 소시지, 햄을 먹고 싶어 했다. 값싼 대구가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자 국민들은 "대구 먹어라, 똥이 더 못하다"는 운율로 화답했다. 대구는 결국 인기를 끌지 못했다. 카바레 테이(Cabaret Tey)는 이런 정책을 조롱하면서 채식주의까지 비꼬았다.
"힘차고 건강해야 하니까
녹말로든, 녹말로든,
욕심을 줄여야 하니까, 오늘은 초식동물, 초식동물.
안심도 등심도 있는데, 광톳나물 맛이 안 난다잖아."
고기 관련 논거는 여러 방향에서 나왔다. 개별 농민 연대(NSZZ) 등록을 위해 싸우던 이들은 "우리를 등록시켜주면 햄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을 걸세"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등록은 되었지만, 햄은 사라졌다.
전쟁 전에는 농민과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고기는 사치품이었고,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거의 매일 먹겠다는 기대와 결의가 생겼을까? 역설적으로 이는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영양실조를 겪은 전쟁과 전후 빈곤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자상한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아이들에게 햄이나 순살고기를 얹은 샌드위치를 억지로 먹였다. '보기 좋게', 살집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고 여겼다. 한편 그 많은 아이들 중에는 기름진 햄보다 크림 치즈를 먹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제는 사회주의 진영 전체와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이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동독 같은 주변국의 상점들은 물건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고기 소비량은 꾸준히 늘었다. 1960년 통계상 폴란드인은 연간 약 43kg의 고기를 먹었고, 10년 후에는 10kg 더 먹었다. 오늘날 인민 폴란드 시절과 달리 고기 소비량은 줄어들고 있다. 2010년 통계상 소비자는 연간 67kg의 고기를 먹었고, 9년 후에는 거의 7kg이나 감소했다.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은 건강에도 좋지 않고, 고기를 생산하는 것 역시 환경에 좋지 않다.
고기에 대한 경건한 태도는 당시 요리 문화의 빈곤함에서도 비롯되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요리 솜씨가 뛰어났지만, 주방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는 꺼렸다. 오늘날 우리는 고기를 덜 먹고, 아예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건강에 더 관심이 많아졌고 요리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식재료를 활용하는 데 더 개방적이다. 현대의 대구 인식이 좋은 예다. 결국 우리는 여전히 인민 폴란드 시절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때의 섭취 제한은 부족 때문이었고, 오늘날의 제한은 의식적인 선택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참고 문헌
- Adam Leszczyński, PRL – Anatomy of protest. Workers' strikes.
- Krzysztof Madej, Kara śmierci za mięso(고기에 대한 사형 선고), IP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