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Every contact leaves a trace)". 프랑스의 셜록 홈즈라 불리던 에드몽 로카르(Edmond Locard) 박사의 이 격언은 오늘날 현대 법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가 되었습니다. 로카르는 1910년 세계 최초의 법과학 전문 실험실을 설립해 프랑스 리옹의 경찰 당국에 제공했으며, 바로 그 순간부터 인류 역사에서 '완벽한 범죄'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로카르의 실험실 뒤에는 범인 검거 능력을 높여 사회 전체의 안전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했던 과학자, 경찰관, 의사들 수십 년간의 연구와 치밀한 분석, 그리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들 중 상당수는 처음에는 의심의 눈길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범죄를 더 효율적으로 검거하고 과거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정교한 법과학 기술로 꽃피게 되었습니다.
살인범을 쫓는 길
19세기는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으며, 법과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의학의 급속한 발전은 과학자들에게 질병과 싸우는 방법뿐만 아니라 경찰 수사를 개선할 방법까지 모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몰타에서 병사들의 시신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를 통해 사후 일정한 간격으로 체온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를 통해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1869년에는 스위스의 연구자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기름에 절인 붕대에서 핵산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발견은 훗날 DNA 구조 규명으로 이어지는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같은 시기 혈액과 모발 샘플의 차이를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개인 식별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탄도 분석도 이 무렵 시작되었습니다. 1835년 스코틀랜드 야드의 직원이 최초로 탄환의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탄환이 만들어진 공장 주형에 남은 고유한 흔적을 통해 탄환을 정밀하게 식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방법들은 수사관들이 범인의 신원이나 행동 양식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사 기법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이정표는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지문: 손끝에 새겨진 서명
지문은 오래전부터 서명의 형태로 역사 곳곳에 등장합니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점토판 거래에 지문을 사용했으며, 중국이나 페르시아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서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7세기에는 볼로냐 대학교의 마르첼로 말피기(Marcello Malpighi)가 최초로 지문의 형태를 학술적으로 기술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관심을 지문에 집중시키고 법과학의 판도를 바꾼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1877년 지문을 신원 확인에 처음 활용한 사람은 윌리엄 허셸(William Herschel)입니다. 인도에 주재하던 이 영국 관료는 인도 병사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매일 직면하던 금융 사기 문제를 없애기 위해 지문 날인을 도입했습니다.
지문 감식(dactyloscopy) 발전의 다음 단계는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헨리 폴즈(Henry Faulds)가 가져왔습니다. 그는 일란성 쌍둥이의 손을 포함한 광범위한 연구를 바탕으로 지문을 분석했고, 모든 사람의 지문은 저마다 다르며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또한 절도 사건 현장에서 지문을 채취할 것을 최초로 제안했지만, 당시 경찰은 이를 즉각 받아들일 만큼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현대 지문 감식의 아버지 세 명 중 마지막 인물은 영국의 인류학자 프랜시스 갤턴(Francis Galton)입니다. 그는 허셸이 작성해둔 지문 기록과 폴즈의 논문을 토대로 자체 연구를 진행했고, 최초의 지문 분류 체계를 개발했습니다. 1892년에는 지문 감식에 관한 최초의 단행본 『Fingerprints』를 출간해 자신의 생각과 연구 결과를 담았습니다. 같은 해, 아르헨티나에서는 지문을 활용해 두 아이 살해 사건을 처음으로 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문 감식이 범죄 현장 조사와 증거 수집, 용의자 신원 확인을 위한 필수 수사 기법의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공식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지만, 이미 1930년대부터 많은 경찰관들이 현대적인 지문 수집·보관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무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유일무이한 유전자 코드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수많은 새로운 법과학 기법이 등장하며 범인 검거와 처벌의 정확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돌파구는 아직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1953년,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라는 두 과학자가 인간의 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는 발견을 해냅니다. 그들의 연구로 탄생한 분자 모델은 인체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 즉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것이었습니다. 이 모델은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과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가 촬영한 X선 회절 사진을 바탕으로 완성되었으며, 이 연구는 법과학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됩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DNA 검사의 새로운 방법들이 잇달아 개발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RFLP, 이른바 유전자 지문(genetic fingerprint)입니다.
RFLP는 특정 염기서열을 인식하는 효소, 즉 DNA 분자를 엄격하게 정의된 위치에서 절단하는 효소를 이용해 잘려 나온 핵산 단편의 길이를 분석하는 기법입니다. 이렇게 얻어진 DNA 단편은 크기별로 분리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사람마다 고유한 바코드와 같은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DNA 검사는 진행 중인 범죄뿐 아니라 이른바 '콜드 케이스(cold cases)', 즉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미제 사건을 푸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DNA 검사 덕분에 최초로 용의자가 결백을 입증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영국인 리처드 버클랜드(Richard Buckland)는 15세 소녀 린다 맨(Lynda Mann)과 던 애시워스(Dawn Ashworth)에 대한 잔혹한 강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DNA 검사 결과 그의 결백이 밝혀졌고, 이후의 끈질긴 수사 끝에 진범인 제빵사 콜린 피치포크(Colin Pitchfork)가 검거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DNA 검사는 현재 진행형 사건과 과거의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데 점차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재개된 미제 사건과 당시 수집된 증거의 분석은 그동안 처벌받지 못한 채 살아온 범인들을 검거하는 결실을 낳았습니다. 실종자 사건 일부도 DNA 분석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기다려온 많은 가족들에게 마침내 답을 전해주었습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마크 보든(Mark Bowden)의 리포트 『더 라스트 트로프: 리옹 자매 실종 사건의 미스터리(The Last Trope. The mystery of the disappearance of the Lyon sisters)』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으며, 해당 보고서는 포즈난 출판사(Wydawnictwo Poznańskie)를 통해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