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잔혹한 이반 4세: 친아들을 살해한 러시아 최악의 폭군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군주로 기억되는 이반 4세 '끔찍한 자'(1530~1584)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습니다. 그는 나라 전체를 피로 물들이고도 동포의 고통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친아들의 목숨마저 거두었습니다.

잔혹한 이반 4세: 친아들을 살해한 러시아 최악의 폭군

끔찍한 이반은 아들마저 살해했습니다.

비극으로 점철된 유년기

만약 이반의 시대에 정신분석가가 있었다면, 그들은 즉시 통치자의 잔혹함의 뿌리를 지적했을 것입니다. 바로 불행했던 어린 시절입니다. 이반은 세 살에 아버지를, 여덟 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미성년 후계자를 대신해 보야르 귀족 일곱 명으로 구성된 섭정 회의가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들은 서로 권력과 영향력을 다투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반과 지체장애를 가진 동생 유리는 하인 취급을 받으며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소년은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탐욕스러운 보야르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커튼 뒤에 단검을 든 자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독이 든 물을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이반은 크렘린 성벽 안에서 생활하며 바깥 상황을 알지 못했고, 스파이들에게 둘러싸여 또래와의 접촉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십 대 시절의 그는 새를 고문하고, 개를 크렘린 성벽에서 던져 떨어뜨리고, 보야르 자제들이 벌이는 난잡한 연회를 구경하며 긴장을 풀었습니다.

편집증과 잔혹함

훗날 미래의 통치자는 절대 권력을 꿈꾸었고, 그것을 위해 가장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며 러시아를 피바다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16세에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프스코프 시민들이 엄격한 통치에 항의하기 위해 크렘린으로 찾아왔을 때, 이반은 그들에게 술을 붓고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습니다. 1547년 모스크바를 강타한 화재 때 격분한 군중이 크렘린으로 몰려들자, 차르는 반란 지도자들에 대한 피진압을 명령했습니다.

잔혹한 이반 4세: 친아들을 살해한 러시아 최악의 폭군

이반 4세 '끔찍한 자'는 사이코패스이자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반은 진정한 편집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디서나 적과 스파이를 의심했습니다. 소위 적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1565년 2월 4일, 그는 특수 부대인 오프리치니나(Oprichnina)를 창설했습니다. 이 부대는 6,000명으로 구성되었고, 검은 복장을 한 대원들은 차르에게 적대한다고 의심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살해하고 약탈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오프리치니키는 법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이반에게만 복종했습니다.

첫 처형은 부대 창설 당일 붉은 광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보야르 일곱 명이 참수당했고, 드미트리 체르비노프 공작은 말뚝에 꽂혀 24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차르의 적들은 종종 자신의 거처에서 가족과 하인들과 함께 몰살당했습니다.

오랫동안 차르의 눈엣가시였던 세묜 로스토프스키 공작은 오프리치니키들에게 얼음 구멍으로 끌려가 목이 잘렸습니다. 시신은 물속에 버려졌고, 머리는 차르에게 가져가졌습니다. 고문과 처형은 이반의 거처인 알렉산드롭스카야 슬로보다에서 자행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삶아지고, 거대한 프라이팬에 구워졌으며, 손톱이 뽑히고 손가락이 여러 방식으로 잘렸습니다. 어느 날 차르는 한 남자를 곰 가죽으로 꿰매 넣은 뒤 굶주린 사냥개들을 풀어 놓고, 그 불공평한 싸움을 구경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또한 검투 경기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창을 든 일곱 명의 수도사를 일곱 마리 곰과 싸우게 한 것입니다.

끔찍한 이반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흡족해했습니다.

"[그는] 피의 강물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고통을 지켜보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과 헐떡임을 들으며 (...) 쾌감을 느낀다. (...) 사람 조각이 마지막 숨을 내쉴 때마다, 그는 이상한 황홀경에 사로잡힌다."

- '끔찍한 자'의 전기를 쓴 앙리 트루아야(Henri Troyat)

노브고로드의 피바다

1570년, 이반은 자신의 가장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노브고로드라는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 것입니다. 무엇이 차르를 이런 학행으로 이끌었을까요? 첫째, 리보니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분노에 사로잡힌 군주는 노브고로드 당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으로 넘어가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끔찍한 자'는 도시의 민주적인 통치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에 그 도시는 중앙 권력에 복속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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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리치니나는 테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먼저 차르의 군대는 노브고로드를 빈틈없이 포위하여 아무도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했습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폭력적인 자들은 현지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한 뒤 모든 성직자를 살해했습니다. 이후 노브고로드의 나머지 주민들이 처리되었습니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도 고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은 곤봉으로 짓밟히고, 팔다리와 귀, 코가 잘렸습니다. 배가 갈라지고, 거세당하고, 산 채로 삶아지거나 구워졌습니다. 갓난아기들은 어머니에게 묶인 채 볼호프 강에 던져졌습니다.

도시에 대한 대학살은 6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자료에 따라 1만 5천 명에서 6만 명에 이르는 노브고로드 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도시는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친아들을 죽인 아버지

진짜 사이코패스답게 끔찍한 이반은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의 불신은 친아들인 1554년생 이반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끔찍한 자'의 아들은 교양 있고 예의 바르게 자랐지만, 역시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폭력과 정교회 성인들의 역사를 배우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렇다면 차레비치(황태자) 이반의 죽음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역사학자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내놓습니다. 사건의 날짜조차 1581년 11월 9일, 14일, 아니면 19일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습니다. 어느 11월 저녁, 아버지와 아들이 크렘린에서 차레비치의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자리를 함께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차르가 며느리의 옷차림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두 이반 사이의 격렬한 다툼으로 번졌습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차르가 며느리와 잠자리를 원했고, 차레비치가 아내를 질투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부자 사이에 정치적 논쟁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잔혹한 이반 4세: 친아들을 살해한 러시아 최악의 폭군

끔찍한 이반이 차르의 옷을 입고 왕좌에 앉은 보야르 지도자 이반 표도로프를 조롱하는 장면. 잠시 후 이반은 표도로프를 칼로 찌릅니다.

격렬한 다툼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끔찍한 자'는 아들의 무례함에 격분하여 철심이 박힌 지팡이로 아들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차레비치는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두개골이 골절되었고, 궁정 의사들은 그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5일(다른 설에 따르면 9일) 후 사망했습니다.

그제야 '끔찍한 자'는 자신의 분노가 왕조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남 표도르는 발달이 늦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차르는 "미친 사람처럼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으며 탄식하고 울부짖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크렘린의 대천사성당에 묻힌 아들의 이름을 외쳤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끔찍한 자'를 변화시켰습니다. 통치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돌이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죽인 사람들의 명단도 작성했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살해된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뒤늦은 참회는 이반 4세 '끔찍한 자'가 파괴한 사람들을 되살릴 수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