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간 만의 함락을 예상했던 독일군, 그러나 결과는?
소련에게 대조국전쟁은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브레스트 요새에 대한 대규모 공격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요새의 수비군이 8시간 안에 무너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산은 크게 빗나갔습니다. 소련 병사들은 무려 한 달을 버텼습니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참 후였습니다. 1942년 2월, 옐리엣카 방면 작전 과정에서 소련군은 브레스트 요새 공격에 참여했던 것으로 확인된 독일 국방군 제45사단의 기록 문서를 확보했습니다. 그중에는 "브레스트 점령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독일군 사령관 슐리퍼 중장은 이 보고서에서 소련군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브레스트의 러시아인들은 극도로 완강하고 끈질기게 싸웠다. 그들은 탁월한 보병 훈련 수준을 보여주었으며, 놀라운 전투 의지를 드러냈다."
그제야 당시 전투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초기 몇 달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붉은 군대 지휘부조차 요새 방어가 어떤 양상이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황과 불신의 시간
전쟁의 그림자가 소련 국경에 다가오면서도,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사실을 고집스럽게 외면했습니다. 그는 자국 정보기관의 보고는 물론 영국 외교관들이 전달한 비밀 경고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언하자, 스탈린은 "주코프는 머리는 크지만 어리석다"며 일축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결과 1941년 6월 21일, 브레스트 요새 인원의 절반 이상이 훈련소로 차출된 상태였습니다. 현지에 남은 병력은 약 9천 명에 불과했습니다(군병원 입원자와 여성, 아이들은 제외).

다음 날 새벽 4시 독일군이 브레스트를 기습했을 때, 병사들과 장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지휘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시켰고, 전쟁을 논하는 모든 이야기는 '선동가'들의 헛소문이라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슐리퍼 중장이 지휘하는 제45사단이 공격해왔을 때 수비군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은 2만 명이라는 수적 우위와 현대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고, 개전과 동시에 퍼붓은 강력한 포격으로 요새의 통신망, 창고, 주요 시설들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소련 병사들은 처음에 반쯤 옷을 갖춰입지 못한 채 혼란스럽게 부대로 집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충격이 가라앉은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용맹의 30일
독일군은 오전 9시경 요새를 포위했지만, 승리를 자축하기에는 너무 이른 셈이었습니다. 수비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독일군의 손실은 장교 21명, 부사관 290명, 그리고 수많은 일반 병사에 달했습니다.
6월 22일 저녁, 독일군은 요새 건물에 육박했고 제45사단 지휘부는 베를린에 요새 점령 소식을 전보로 알렸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낙관은 시기상조였습니다. 수비군들에게 항복이란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표트르 가빌로프 소령이 지휘하는 600명 규모의 부대는 동부 요새에 집결해 공격자들에게 맞섰습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은 열악한 무장 상태였고 탄약을 보급받을 곳도 없었지만, 결정적인 강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새의 지형과 지하 통로, 카즈마트(요새화된 격납고)의 배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하수구를 통해 물과 식량을 전달해준 아내들과 가족들의 헌신적인 지원도 이어졌습니다. 총을 다룰 줄 아는 여성들은 직접 전선에 나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기도 했습니다.

7월 1일, 독일군은 요새 수비군의 핵심 세력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며 또다시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붉은 군대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투는 게릴라전 양상으로 바뀌었고, 소련 병사들은 요새 전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가장 예측 불가능한 지점에서 나타나 나치군을 기습했습니다.
마지막 수비자, 가빌로프 소령
공식 기록에 따르면 브레스트 요새의 마지막 수비자는 앞서 언급된 표트르 가빌로프 소령으로, 1941년 7월 23일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는 이미 극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는데, 그를 검진한 독일군 의사의 보고서가 이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 [가빌로프]는 소령 제복을 입고 있었으나 옷은 해져 있었고, 얼굴은 그을음에 덮여 길고 두꺼운 수염이 자라 있었다. 부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며 극도로 야위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살이 다 빠진 해골이었다."
적의 손에 넘어간 그 순간, 가빌로프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습니다. 독일군 병원에서 마시라고 준 물조차 삼킬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정신력은 강철 같았습니다. 그를 생포한 병사들은 보고서에서, 포획되기 한 시간 전까지 이 장교가 그들에게 발포하고 수류탄을 던져 일부를 사상시켰다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죽어가지만 항복하지 않는다!"
브레스트 요새 수비군에 대한 진실이 온전히 밝혀진 것은 붉은 군대가 조국을 탈환한 뒤 서쪽으로 진격하면서였습니다. 1944년 7월 28일, 소련군은 적을 브레스트에서 몰아내고 요새에 입성했습니다.
그들은 요새 내 각 건물을 면밀히 조사했고, 1941년 여름 수비군들이 남긴 수많은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투쟁을 증언하는 유언장과도 같은 기록이었습니다. 테레스폴 게이트 근처의 벽돌 벽에는 누군가 이런 말을 새겨두었습니다.
"우리는 다섯이었다. 세도프, 그루토프, 보골류보프, 미하일로프, 시바노프. 우리는 첫 공격을 막아냈다. 1941년 6월 22일. 우리는 죽더라도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
한때 정교회 성당으로 쓰이던 병사 클럽 건물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 명의 모스크바 출신이었다. 이바노프, 스테판치코프, 준티아예프. 우리는 함께 이 성당을 지켰다. 우리는 서로에게 죽음을 택하더라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941년 7월."
"이제 나 혼자 남았다. 스테판치코프와 준티아예프는 전사했다. 내 손에는 마지막 수류탄 하나가 남아 있다. 나는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동료들이여, 우리 원수를 갚아 달라!"
요새에 남겨진 마지막 글귀는 1941년 7월 20일의 것이었습니다.
"나는 죽어가지만 항복하지 않는다. 조국이여, 안녕."
1944년 여름, 가빌로프 소령이 포로가 된 이후에도 브레스트에서 독일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요새 수비군의 아내들과 자녀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요새의 지하 통로와 카즈마트 깊숙한 곳에는 홀로 남아 끝까지 적과 싸우려는 소련 병사들이 아직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