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2분의 침묵에 담긴 80년의 기억 — 네덜란드 전쟁 추모일의 변천사

매년 5월 4일 저녁 8시, 네덜란드 전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2분간의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1945년 이래 70여 년간 이어져 온 이 전통이지만, 침묵에 담긴 의미는 시대에 따라 크게 변화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전사한 레지스탕스 영웅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겪은 인도주의적 재난에 대한 기억을 미래 세대에까지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잊혀졌던 희생자들

최초의 추모일은 1945년 5월 9일 암스테르담 다미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았고, 시의회는 추모 행사 개최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추모의 대상은 점령군에 맞서 싸우다 쓰러진 레지스탕스 요원들이었으며, 유대인 희생자들은 이 의식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특히 암스테르담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겪은 파괴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수용소와 은신처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생존자들은 이후 몇 달에 걸쳐 한 명씩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과 집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고, 심지어 미납 고지서에 대한 추가 세금까지 부과받았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의 집에는 흔히 NSB(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운동) 당원들이 살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전직 수용소 수감자를 위해 마련된 보호 시설 역시 유대인이 아닌 레지스탕스 영웅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중 네덜란드인들이 절멸수용소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례 없는 공포의 소문과 전시 소식의 불신 때문에 들은 이야기를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연합군은 굶주린 수감자들, 셀 수 없이 많은 시신, 가스실에 대한 끔찍한 사진과 보고서를 유럽 전역에 알렸고, 이를 선전으로 치부했던 사람들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나치가 한 민족을 의도적으로 절멸시키려 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럼에도 당시 네덜란드의 여론은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였습니다. 재건의 시대에는 과거를 돌아보기보다 국가를 다시 일으키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가해진 일은 끔찍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위협도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옛 동맹국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을 앞세워 서쪽으로 밀어닥칠 수 있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레지스탕스가 주관한 추모일

전쟁 직후 몇 년간 네덜란드 사회는 유대인 희생자를 제외한 온갖 일에 분주했습니다. 암스테르담 자치단체의 첫 추모 행사 이후, 1946년부터는 전직 레지스탕스 요원들의 모임이 국가 추모일을 주관했습니다. 이들은 전사한 레지스탕스 영웅과 군인을 추모하는 군사적 성격의 의식을 추진했으며, 가스실에서 학살된 유대인이나 네덜란드 안에서 기근과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을 추모하는 일은 아직 상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희생자의 처우는 추모일에서만 잊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만의 추모비가 세워지기까지는 1962년까지, 무려 17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장소는 암스테르담의 홀란트셰 스하우부르크(Hollandsche Schouwburg)로, 네덜란드 유대인의 상당수가 베스터보르크 등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기 전 모였던 극장이었습니다. 추모비에는 '1940~1945년에 쓰러진 유대인 동포를 기리는 장소'라는 문구가 새겨졌지만, 마치 유대인들이 전장에서 전사한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자국의 전쟁사와 희생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시작이었습니다. 역사학자 라우 더 용(Lou de Jong)의 대형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점령(The Occupation)』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 5년간 이 시리즈는 시청자들을 화면 앞에 매료시켰습니다. 전쟁을 직접 겪은 대다수 사람들과 외상을 입은 유대인 공동체는 오랫동안 과거를 돌아보기를 꺼려왔지만, 이제 전쟁의 기억은 더 이상 덮이지 않았고 유대인의 운명은 더 이상 비밀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유대인 희생자,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희생자 전체의 약 40%를 추모할 때가 된 것입니다. 1961년부터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모든 전쟁 희생자와 전사자가 공식적으로 추모되었고, 이후 추모일은 점차 군사적 색채가 옅어지며 초점이 희생자에게로 옮겨갔습니다.

추모에서 홀로코스트 기억의 공간으로

이러한 변화는 아우슈비츠 같은 절멸수용소와 네덜란드의 통과수용소 베스터보르크(Westerbork)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진행되었습니다. 베스터보르크는 전쟁 발발 전부터 독일에서 온 유대인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전쟁 후에는 협력자들을 재판 전까지 가두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수용소가 비워진 직후 목격자들은 이곳을 추모의 장으로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국가 추모비가 세워지기까지는 1970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비로소 그 필요성을, 그리고 그 이상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단순한 추모의 장을 넘어 전쟁의 이야기를 전하는 기억의 공간을 만들자는 구상이 등장했습니다. 1983년 캠프 베스터보르크 메모리얼 센터가 문을 열었고, 정부 역시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한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1987년에는 국가 추모일과 해방일을 주관하는 '5·4 국가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추모 행사는 더 이상 사적 이니셔티브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베스터보르크 같은 수용소는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복원을 통해 방문객들은 전쟁 중 얼마나 참혹한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살았는지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베스터보르크는 국민적 인식 속에서 '네덜란드의 수용소'에서 '나치 체제의 일부'로 재해석되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면서 아우슈비츠 같은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도 찾아갈 수 있게 되었고, 이곳들이 추모 공간과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홀로코스트 관광'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생존자나 유족만이 이 끔찍한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없기를', 그 의미의 확장

제2차 세계대전 추모의 다음 큰 전환점은 또 다른 전쟁, 정확히는 집단학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95년 스레브레니차의 비극입니다.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에 대한 대량 학살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는 아우슈비츠가 없기를'은 '다시는 인종혐오가 없기를'로 확장되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린 나이에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의 운명을 배우며, 인종혐오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러한 교육과 인식 개선에 대한 강조는 국가 추모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의식에서 직접 역할을 맡으며, 자신들이 쓴 시를 낭송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깊어지고, 추모의 장소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즉 후대 세대에게는 이 참화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기록되고, 전해질 때 비로소 '다시는 없기를'이라는 약속이 지켜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