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소련군에 붙잡혔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은 보물로 가득 찬 서류가방과 가죽 트렁크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1945년 8월 19일, 황제 푸이는 봉천(선양) 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소련군이 그를 포위했고, 짧은 협상 끝에 푸이와 수행원들은 소련 수송기에 오르게 되었다. 비행기는 몇 분 뒤 북쪽으로 이륙했다. 다음 날 만주 측 당국은 스탈린에게 황제의 행방불명을 알리는 서신을 보내며, 푸이가 "곧 석방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을 전했다.
특별한 취급을 받던 포로
푸이와 일행은 치타로 옮겨졌다. 황제의 경비는 알렉산데르 젤바코프가 담당했다. 그는 상관인 필라슈킨 장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저 푸이란 놈은 천민이고, 일행도 하나같이 추접스러운 인간들이다. 한 명 한 명 네 목숨으로 책임져라. 외부 경비는 우리가 맡겠다. 다만 푸이는 반드시 무사히 보전해야 한다."

자금성 시절의 황제 푸이
포로들은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평범한 주택에 수용되었다. 집 앞에는 항상 위병이 서 있었고, 바깥에서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십여 명의 병사가 건물을 지켰다. 안에는 고위 장교들이 배치되어 포로들을 감시했다. 황제와 일행은 이 집에 갇혀 지내는 동안, 젤바코프의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중국인들의 손에는 서류가방과 가죽 트렁크가 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라슈킨 장군은 짐을 만지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했는데, 그 안에 귀중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5년 11월, 황제는 하바롭스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본 전범 재판의 핵심 증인으로 참석하기를 기다렸다. 체포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극심한 그리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설령 러시아의 억류에서 풀려나 중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감옥살이는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12월 말, 푸이는 필사적인 수를 두었다. 요시프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이다.
"귀국 정부가 제 생명을 구하는 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어 소련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이에 깊은 감사를 다시 한번 드립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귀국 당국에 소련 영구 거주 허가를 요청드립니다. 이는 제가 학문적 지식을 더욱 쌓을 수 있는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마음 깊이 소련의 현실을 알고 싶습니다 (...). 만약 소련 정부가 특별히 제 소련 거주를 허락해 주신다면, 그것은 저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 주는 것이 될 것이며, 저에게 최대한의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젤바코프가 목격한 서류가방과 가죽 트렁크들
푸이는 나아가 자신을 공산당에 입당시켜 달라고까지 요청했다. "당 안에 황제도 있습니까?"라는 황제의 질문에 '없다'는 답이 돌아오자,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제가 첫 번째가 되겠습니다."
수수께끼의 트렁크
포로 생활의 나날은 스탈린의 회신을 기다리며 흘러갔다. 포로들은 아침 7시에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했다. 어떤 이는 중국 전통 체조를 하고, 어떤 이는 불경을 읽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카드 놀이에 몰두했고, 대화 중에는 일본을 원망하거나 옛날 이야기를 소환하곤 했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은 늘 자신의 보물에 쏠려 있었다. 하바롭스크에서 보물이 든 트렁크는 결국 압수되었고, 그 가치가 감정되었다. 그 결과, 보석 111점의 총액은 47만 3,975루블로 산정되었다.
그러나 이 금액은 실제 가치를 크게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1.7캐럿 진주가 박힌 순도 750의 금반지는 겨우 400루블, 3.3캐럿짜리 진주 네 알이 박힌 순도 958의 금귀걸이 한 쌍은 600루블에 책정되었다. 게다가 황실 보석 중에는 진정으로 세상에 유일무이한 작품들도 있었다. 무게 218.3캐럿과 596.0캐럿에 이르는 순도 1000의 금원판 두 점, 작은 가넷(석류석)을 박아 시계를 장식한 순도 958의 금함, 그리고 큰 진주를 단 거미 형태의 순도 1000짜리 금핀—머리는 온닉스, 날개는 마노, 눈과 목은 진주로 장식된—등이 그 예이다.
소련의 속임수
소련은 중국의 귀중품들을 탐냈다. 그러나 아무리 소련 당국이라 해도 법원 명령 없이는 함부로 압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기만이었다. 1946년 5월 10일, 황제는 내무부의 교외 관저로 옮겨졌다. 그는 환한 홀로 안내되었고, 탁자 상석에는 쿠드랴프체프 대령이 앉아 중국인 손님을 만찬에 초대했다.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하고 평온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장교들은 이것이 심문이 아니라 사적인 대화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다 쿠드랴프체프가 입을 열었다. "푸이 씨, 궁금한데 말입니다. 보유하신 보석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사실은 지금 소련에서 국민경제 재건에 돈이 필요합니다. 귀하가 보석들을 소련 정부에 기증해 주시겠다면 우리는 매우 기쁠 것입니다." 황제는 이것이 완곡한 명령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전부터 이 문제로 대화를 시작할 적절한 기회가 없었는데, 대령께서 먼저 꺼내 주셨으니 기꺼이 소유한 모든 보석을 소련 당국에 바치겠습니다."
종이와 펜이 즉시 가져와졌다. 푸이는 이렇게 적었다. "소련 정부가 제 보석들을 받아들여, 국민경제의 재건과 발전에 사용해 주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이로써 중국 왕조의 보석들은 소련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흩어져 버린 보석들
1950년 가을, 소련은 황제와 그의 보물들을 중국에 인도했다. 그러나 소련이 작성한 목록에는 많은 물품이 빠져 있었다. 의식용 검, 보석을 박아 넣은 은 부채 등 수많은 물건이 그러했다.
그것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대 황금 검은 국고에 보관되었다가 모스크바의 한 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년 전 키이우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푸이 컬렉션의 여러 유물이 출품되었는데, 이것들이 어떻게 우크라이나의 수도에까지 흘러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리비우에서도 몇 점이 전시된 바 있다. 역사가 드미트리 리하노프에 따르면, 귀중품 일부는 아직도 개인 컬렉션에 남아 있다고 한다.
참고 자료
- 리하노프 D., 「마지막 중국 황제의 보물」, rg.ru (2022년 1월 24일 확인)
- 「마지막 중국 황제의 보물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www.pravda.ru (2022년 1월 24일 확인)
- 다큐멘터리 『마지막 황제와 국보』("Последний император и национальные сокровищ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