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는 이혼이라는 제도가 없었다. 대신 부부 간의 불륜과 범죄적 욕망은 넘쳐났다. 이것은 치에하누프 성주 야쿠프 보글레프스키, 그의 아내 도로타, 그리고 사제 얀 피니아젝의 이야기다. 위대한 사랑과 배신, 그리고 잔혹한 내장 적출형이 얽힌 이야기.
"제 이름은 야쿠프 보글레프스키입니다. 저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지요." 우리 기사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저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치에하누프의 성주이자 스타로스트(총독)를 맡고 있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아내 도로타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문 간의 정략으로 맺어진 부부가 아닙니다. 제 도로타가 마조비아 주지사 로갈라의 딸이며 300즈워티의 지참금을 가져왔다는 건 그저 세부사항일 뿐입니다. 그녀는 제 인생의 여인입니다. 물론 질투하는 이들이 많아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부 믿다가는 미쳐버릴 겁니다."
반드시 죽여야 할 남자
1466년 1월 5일 저녁, 야쿠프 보글레프스키는 륭체시체(오늘날 그루예츠 군)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24시간 뒤, 치에하누프의 성주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의 찢겨나간 시신은 도무지 온전한 형태로 합쳐질 수 없었다.
수요가 많은 직업, 중세 사제?
도로타에 대한 소문은 결국 사실로 밝혀졌다. 그녀는 보글레프스키와 같은 문장(세 개의 창과 옐리타 문장)을 지닌 사제이자 동향 출신인 얀 피니아젝과 불륜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주 살해 계획까지 세웠다.
불완전한 알리바이
공모자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연인 커플 외에도 성주를 섬기던 공증인 야쿠프 야체호프스키, 사제의 하인 플리흐타와 코마스키가 가담했고, 도로타의 시녀 역시 모든 계획을 알고 있었다. 보글레프스키가 사랑하는 아내 곁에서 잠든 그 밤, 살인자들은 창과 검, 도끼를 들고 달려들어 그를 문자 그대로 토막 내 버렸다.
사건 현장: 륭체시체. 사진 속은 종탑이 딸린 18세기 교회다.
살인 직후 사제 얀 피니아젝, 플리흐타, 코마스키는 밤길을 질주해 런치차 방면으로 급히 달아났다(그날 밤 무려 20마일 가까이를 이동했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정적 증거
다음 날, 피해자의 동생 미코와이 보글레프스키가 인근의 수많은 기사들을 대동하고 륭체시체에 나타나 공모자 세 명, 즉 공증인 야쿠프, 도로타, 그리고 그녀의 시녀를 붙잡았다. 과부의 곁에서는 얀 피니아젝이 성주 살해 계획을 상세히 적어 둔 편지가 발견되었다.
생각에 잠긴 사제. 머릿속에서 범죄 계획을 짜고 있던 걸까?
이후의 전개는 중세의 여성 차별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슈는 "성별 때문에... 그녀는 모든 책임을 면제받았다"고 기록했다.
미코와이 보글레프스키는 바르샤바 수도원의 성 베르나르디노 회귀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여성들의 안전만큼은 보장해달라고 간청하자 연민을 느껴, 산 채로 땅에 묻히기로 예정되어 있던 도로타와 어린 시녀를 처벌 없이 풀어주었다.
그리고 판사들은 공증인 야쿠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산 채로 내장을 적출당한 뒤, 비명에도 불구하고 사지가 분해되도록 처형되었는데, 이는 그의 예를 따라 누군가 여인의 사악한 사랑에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처벌받지 않은 범죄
사제 얀 피니아젝은 아버지(크라쿠프 궁내관)와 그니에즈노 대주교의 보호 덕분에, 특히 공증인 야쿠프와 비교하면 꽤 호강하며 끝냈다. 그 성직자는 3년 반 동안 "끔찍한 감옥, 탑 속의 어두운 구덩이"에서 지낸 뒤 석방되었다.
그는 1490년 그니에즈노의 참사회원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1466년 당시에도 살인범 도로타를 어떻게든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 빠르게 튜턴 기사단령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또 혼자가 아니었다. 체코 출신 한 남자가 유혹적인 과부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얀 드우고슈. 위대한 수다쟁이. 그가 없었다면 야쿠프 보글레프스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또 다른 타락한 성직자가 그들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었을지도 모른다...